살아내는 영혜의 삶, 견뎌내는 모든 엄마들의 삶, 감내하는 우리의 삶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단지 영혜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언니 인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은, 이 차가운 세계 속에서 기어이 살아내려 했던 사람의 고단한 숨결이다.
채식주의자는 ‘나무가 되고 싶다’는 영혜의 절규만큼이나, 나무가 될 수 없었기에 더 아픈 인혜의 이야기다.
인혜는 살아남은 사람이다.
동생처럼 고기를 거부하지도 않고, 형부처럼 예술이라는 명목 하에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녀는 현실을 감당하고, 가게를 꾸려 나가고, 자식을 키우며, 병든 가족을 부양한다. 그 삶은 겉보기에 단단하지만, 사실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는 삶이다. 그런 인혜가 영혜의 이상하고도 위태로운 선택 앞에서 끝내 눈물을 쏟는 장면은, 단지 동생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끝내 택할 수 없었던 자유, 끝내 거부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고통의 울음이다.
인혜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끝까지 곁을 지킨다. 그러나 그 곁은 보호라기보다는 끝없는 견딤이다. 동생이 식사를 거부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그녀는 모든 현실적 후폭풍을 감당한다. 의사의 질문에 답하고, 보호자 서류에 서명하며, 가족의 미움을 대신 감당한다. 그 모든 장면 속에서 인혜는 희생의 역할을 넘어서, 절망과 체념 사이를 건너는 한 인간이다. 어쩌면 인혜야말로 이 소설에서 가장 외롭고도 아픈 인물이다.
더욱 가혹한 것은, 남편의 배신이다. 그녀는 말수가 적고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조용히 곁을 지켜줄 사람이라 믿었던 배우자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동생을 욕망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부정이 아니라, 존재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배신이다. 자신의 동생과의 관계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남편의 욕망은, 인혜에게 다시 한번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확인시킨다. 그녀는 정상이라는 가면 뒤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런 그녀를 가장 가깝게 배신한 이는, 가장 평범하다고 믿었던 남자였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혜는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그녀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을까?", "이렇게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감당하고 있으며, 여전히 울지 않는다. 그 무표정한 버팀 속에, 그녀의 진심은 처절하게 웅크려 있다.
영혜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인혜는 뿌리조차 내릴 수 없는 황무지에 선 채, 눈물도 없이 버티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해방’을 선택한 자와, ‘존속’을 감내한 자의 이중 초상이다.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묻는 대신, 독자는 이 둘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정상”이라는 이름의 폭력, 여성에게 부과되는 억압적 윤리, 그리고 침묵 속에서 무너지는 존재의 위태로움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 중심에는 영혜가 있지만, 그 그림자의 언저리에는 언제나 인혜가 있다.
우리는 종종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에게만 집중하지만, 실은 끝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버티는 자들, 바로 인혜 같은 존재에게도 응시를 건네야 하지 않을까.
엄마가 생각난다.
살아내는 영혜의 삶은
견뎌내는 모든 엄마들의 삶이며,
감내하는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George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