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엔
오늘내일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다.
비가 오는 날엔 난 어렸을 적 추억이 생각이 난다.
지금은 계산택지라 불리는 곳에 우리 가족은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가 입학하기 전에 이사를 온 것으로 기억난다.
정확한 위치는 기억엔 없지만 화려한 아라비안나이트를 필투로 하여 저녁에는 술집, 음식점들이 밀집된 지역쯤으로 추정된다.
당시 계산택지가 개발되기 10여 년 전이라 그곳은 복개천을 중심으로 논과 밭 그리고 목장들이 있는 거의 시골에 가까웠다.
그 당시 우리 집은 거의 판자촌 수준의 단칸방이었으며, 가스도 들어오지 않아, 집에서 곤로 같은 걸로 요리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물론 화장실 시설도 십여 집 이상이 하나의 화장실을 공유하는 수준으로 참을성과 인내를 기르는 데는 아주 훌륭하고 향기로운 공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든 밤,
부모님이 나와 누나를 깨웠다.
계양의 젖줄 복개천(지금은 없어진)이 여름철 폭우로 범람한 것이다.
단칸방에 물이 차올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옆집 동근이네 엄마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려 깨웠다고 한다. 안 깨웠으면 아마 우리 가족은 단칸방에서 함께 천국행 열차를 탔을지도 모른다.
암튼, 부모님과 누나와 나는 대충 옷만 입고, 집 밖으로 나가, 계양산이 보이는 계산동 쪽으로 처음에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이 거의 허리를 넘어 가슴까지 차오르는 수준의 폭우길을 걸어갔다.
중간에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도착한 곳은 부모님이 다니는 계산동 고무공장 근처의 동료분(길호형네)에서 씻고, 며칠은 보냈던 걸로 기억난다.
항상 착한 길호형은 키가 엄청 컸지만 목에 크게 데인 상처가 있어 남들은 혐오스럽다고 피하곤 했지만 말없이 한결같은 착한 길호형이 좋았다. 지능은 보통사람보다 높지 못해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나고, 계산동 각지를 마치 보안관처럼 슬리퍼를 신고 순찰을 돌아다녔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은 이유는 정확힌 알 순 없지만 스무 살 전에 하늘나라로 갔다고 들었고, 그 소식을 듣고 약간 마음이 울렁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비가 많이 오는 날 아마 1학년때로 기억하는데, 계양산의 산사태로 계양산 자락에 살았던 같은 학년 친구가 산사태로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높은 지대에 살아도 꼭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어릴 적에 깨달았다.
며칠 후 복개천 바로 옆 택지 쪽 다세대 우리 집에 가보았고, 그 집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였다. 자식들의 단백질 공급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복개천 아래쪽 아빠가 키우던 철장에 있던 닭 여덟 마리도 철장과 함께 떠 내려간 듯 아무 흔적도 없었다. 나도 그 여덟 마리 닭들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나고, 상실의 아픔이 약간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얼마 후 우리 가족은 좀 더 높은 지대인 계산시내의 주봉이네 옆집으로 이사를 갔다.
우리 가족은 폭우의 그날 이야기를 지금까지 서로 해본 일이 없다.
그렇게 나의 폭우 같은 여덜살 여름이 지나갔다.
엄마가 학창 시절 나에게 해준 얘기가 생각난다. 나의 사주를 봤는데 점쟁이가 물을 조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이름에 ‘수'자를 넣었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엄마말은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폭우가 내리거나 비가 많이 오면 나에게 문자나 전화를 한다.
군대 시절에도 정통으로 맞은 태풍 매미와 루사의 폭우 때문에 근무 중 가슴까지 차오르는 엄청난 양의 빗물로 비슷한 개고생을 한 경험이 있다. 그때 약간 엄마가 한 말과 점쟁이가 생각났다.
난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을,
특히 폭우가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비가 오는 날엔,
나도 엄마처럼 마음이 쓰이고
걱정되는 사람을 챙긴다.
George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