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뵐뇌브 감독 영화 ‘컨텍트(Arrival)’ 비평

선형(Linear)과 원형(Circle)

by 조지조




굉장한 다독을 하는 지인은 어떤 책이든 사랑하는 문장이 한 문장만 발견되면, 그 문장으로 모든 책의 내용을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문장에 꽂히거나 느낌이 오면 그때부턴 책에도 더욱더 반하는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며, 문장이나 대사에 꽂히면 나도 모르게 아래와 같은 문장이 외워진다.



1)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도입부 유명한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2)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의 도입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3)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초중반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4) 밀란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부분의 문장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이 문장들은 이 명작들의 색채와 느낌 그리고 메시지까지 관통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독서의 과거, 현재, 미래의 선형적인 흐름은 중요치 않다.


반하는 문장이 도입부에 있든, 중간에 있든, 말미에 있든 우리는 그 작품을 반하는 대상으로 인지하여 문장의 후광효과가 책에 샘솟는다.


좋은 작품은 독자가 철석같이 믿고 알고 지지하는 세계관과 진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SF소설이나 영화는 허구라기 보단 세계관의 확장이다.


드니뵐뇌브 감독의 SF영화 ‘컨텍트(Arrival)’의 초반부터 관객의 선형적 체험의 기대를 깨부수며 헷갈리게 만든다.


이 작품에 감독은 내가 반한 대사를 영화 말미에 영리하게 숨겨 놨다.



영화는 언어학자 루이즈 박사가 딸 한나와 놀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듯하지만, 곧 장면은 한나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되고 루이즈가 슬퍼하는 장면으로 바뀌어 버린다. 장면은 다시 현재로 바뀌고, 루이즈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러 들어가니, 12개의 외계비행물체가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 상공에 등장했다는 뉴스 속보가 전해진다. 언어학자인 루이즈 박사와 물리학자인 이안박사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국가의 명령을 받고 새까맣게 타버린 웨지감자처럼 생긴 400미터짜리 외계비행물체에 올라타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들과 방호복을 입고 소통을 시도한다.


문어 외계인은 먹물 같은 것을 뿌리며 자신들의 언어를 표현한다. 여기서 문어 외계인의 언어는 비 선형적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원형 즉 동그라미이다.


영화 ‘Arrival‘ 속 외계인 언어는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다. circle 안의 두께, 농도, 끊김으로 동시에 표현하는 시각화된 통짜 문장이다.



고분자(Polymer) 재료에 몸을 담고 있는 나는 영화 속 외계인의 원형적 언어가 폴리머의 체인구조로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폴리머의 체인 구조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선형(linear) 구조, 비 선형(nonlinear) 구조 즉, 가지형(branched), 가교형(cross-linked), 그리고 아로마틱 링(aromatic ring) 즉 원형(circle) 구조이다. 보통의 폴리머(플라스틱)의 강성과 내열도의 우수성은 아로마틱 링 구조일 때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하다. Aromatic ring은 벤젠고리로 공명 안정성이 우수하며 강성과 내열성이 우수하고 열적, 화학적 안정성이 매우 높은 Super Engineering Plastics에 구조에 많다. 대표적인 소재가 방탄복 소재인 PI(케블라)이다.


아로마틱 원형구조의 강력한 슈퍼엔지니어링 폴리머처럼 그들의 원형적인 언어도 이외로 안정적이고 우수한 소통의 도구이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소통을 점점 이어가는 주인공 루이즈 박사의 시점에는 현재, 과거, 미래가 뒤섞여 있다. 문어외계인들은 루이즈에게 무기라는 선물을 준다.


"루이즈는 미래를 본다. 무기는 시간을 연다." 문어외계인이 원형적 언어로 응답한다.


시간을 직선적인 흐름으로 인식하는 인간과 달리 문어 외계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동등하게 인지하는 종족이었고, 루이즈는 그들의 문자를 배워 사고가 외계인처럼 변형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사고와 능력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형성되고 발전하는 학설을 방증하는 장면이다. 시간 순서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는 인류의 문자가 선형인 것과 달리, 외계인의 문자가 시작도 끝도 없는 순서도 없는 원형이라는 특징이다.


언어학자이자 범우주적 소통 전문가인 루이즈의 활약으로 외계인들이 떠난 후, 루이즈는 이안에게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 미래를 바꿀 것인지 질문한다.


문과대빵(언어학자)이 이과대빵(물리학자)에게 질문한다. 이과대빵 이안은 문과대빵의 원형적 질문에 자신의 선형적 사랑을 루이즈에게 고백한다. 직후 루이즈는 환영 속에서 남편이 된 이안과 둘 사이에 생긴 딸 한나를 보게 된다. 이안은 아이를 갖고 싶은지 루이즈에게 물어본다. 영화의 시간은 또 비선형적으로 흐른다. 루이즈는 자신의 딸이 어린 나이에 희귀병으로 죽게 될 것과 이안이 자신과 한나를 언젠가 떠나버리는 등 이 사랑이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고 싶다고 대답한다.



자! 이 장면에서 별 것 아니 것 같은 평범한 대사가 나에게 가공할 만한 원투 펀치를 먹인다.


이때 루이즈는 이안의 고백을 받아들이며 포옹을 하는데 "당신 품이 이렇게 따뜻한 줄 잊고 있었다."라는 대사를 뱉는다.


루이즈는 이미 이안이 떠날 것이고 딸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더 꽉 이안을 껴안는다.


포옹은 두 선형적 인간을 하나의 원형으로 만들어주는 따뜻한 행위이다.



그들의 언어를 배워 미래를 보는 능력이 루이즈에게는 저주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었다.


그녀는 원형적 사고로 자신의 앞으로의 삶이자 과거의 삶이자 현재의 삶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당신 품이 이렇게 따뜻한 줄 잊고 있었다.”


이성은 선형적이지만, 감성은 원형적이다.


결국, 시간도 선형이 아니라


원형으로 흐른다.


George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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