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누구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지천명(知天命)이 거의 다 된 지인이 얼마 전 나에게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서 좀처럼 빠질 줄을 모른다.
지인과 헤어진 후 나는 앞날에 대한 신나는 상상보다는 과거를 단편적으로 톺아보며 반추하는 것이 이제는 좀더 자연스러워짐을 느낀다. 삶의 흔적들을 소환하면서 작열하는 태양 앞에 달아오른 내 표정은 웬지 모르게 쓸쓸하다.
어느 덧 사춘기의 아우라(aura)가 풍기는 초등학생 딸이 주변 친구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쓰며 고심하는 모습을 보며,
나아가 대학교 친구는?
내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여버린다. 이런 방식으로는 도대체 언제가, 그리고 무엇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의미’의 의미는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나름 통찰을 한답시고 마지막 단계의 결론에 천착(穿鑿)하여 그 과정을 간과하거나 도말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조물주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젊은 남녀가 서로 처음 만났는데, 어느 한 쪽이 ‘어차피 우리는 결혼을 전제하는 관계로 만난 것’이라면서 서서히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하기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큰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만히 이루어질 인연도 오히려 어긋나기가 쉽다.
청년은 하루 하루를 힘들어하며 죽지 못해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장년은 삶의 재미보다 자식들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 하며, 노인은 외롭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는 노년의 시간의 쓸데없이 길다고 투덜댄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어차피 죽게 될 텐데 당신이 그토록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류, 아니 지구 또한 먼 훗날에는 태양의 팽창으로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데, 우리가 결론을 어렴풋이 알지라도 그 과정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결론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과정, 즉 삶의 매 순간에 충실하며 더 나은 자신과 주변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순리대로 사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마지막의 내가, 그동안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지금의 내 모습과 바라던 모습과의 간격과 괴리. 나는 그것을 다른 말로 ‘고통’이라고 부르고 싶다. 평소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명랑하게 살아가는 나의 입에서 ‘인생은 고통’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내 주변인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물론 나는 행복을 만끽하며 작은 것에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결국 고난이라고 표현함을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독일의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와 같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다 끝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인생이 고통임은 분명하지만 그 고통을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암호를 풀어내듯이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고통은 조물주가 우리에게 보내는 ‘암호’이며, 고통이 있을 때는 해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왔던 삶이든 그렇지 않든 내 인생의 주인공은 어차피 나일 수밖에 없다. 오감(五感)과 사고작용의 주체가 오롯이 나이기에 이는 자명한 이치이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처럼 인생의 주체는 자신이지만 타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성숙해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타인이라 할 수 있는 ‘멘토’나 ‘롤 모델’이 우리를 과도하게 방황하지 않게 해주는 안전장치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 삶을 주도적으로, 충실히 살지 않고 남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개입으로 양쪽 모두의 인생을 해롭게 하는 경우이다. 상세한 예시를 들 것도 없이 이는 부모나 자식에게 둘 다 자신들의 인생을 온전히 영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비단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지인들 사이에도 질투와 시기, 미움이 가득 차 있으면 그때부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이다. 누구나 수없이 경험해 보았을 이러한 주객전도의 현상은 우리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피곤하게 낭비해 버린다. 오늘을 살면서도 그 사람을 떠올리며 원망과 저주를 하고, 그 사람이 잘못되기만을 상상하는 우리... 그 사람이 먼저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고 가슴 속에서부터 울분에 찬 항변이 튀어나오지만, 침을 튀기는 나의 모습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왜일까.
조물주는 인간을 죽음이라는 결론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 방점을 두었다.
자타(自他)가 보기에 초라한 나일 수 있다. 내 삶이 비극으로 치닫는 연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나뿐이며, 아무리 근사하고 화려한 타인일지라도 조연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비록 마지막에 죽게 되는 주인공일지라도 분장실에서는 환화게 웃으며 볼터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