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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엄마 Mar 24. 2020

엄마, 나 글씨 공부 좀 하고 나올게!

천지개벽은 웃음에서 시작됐다.

거의 모든 아들들이 그렇듯(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 집 아들도 글쓰기를 엄청나게 싫어한다.

원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유치원 때도 따라 쓰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새로운 상형문자를 만들어내는 일은 신명 나게 해냈지만 정해진 순서대로 이미 정해져 있는 글자를 적는 일은 웬만해서는 하지를 않았다.(숙제만 간신히 하는 정도) 결국 한글은 학교에 가서 떼었고 받아쓰기도 힘겨운 일, 글자를 바르게 쓰기는 더 힘든 일이 되었다.

굳이 원인을 따져보자면 우선은 쓰기가 단련되지 않은 손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들 입장에서는 끝없이 펼쳐지는 생각을 아주 느린 속도로 받아 적는 자기 손을 그냥 봐 넘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쓰기는 답답하니 말로 해버렸다. 그래서 글씨는 언제나 날아가고 언제나 띄어쓰기가 안되어 있으며 언제나 갑자기 끝났다.

글자 크기도 일정해야 하고 수평도 맞아야 하고 심지어는 연필심이 달라 글자 두께가 바뀌는 것까지 신경 쓰며 중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예쁜 글쓰기에 정성을 바쳤던 나로서는 그냥 봐 넘기기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 쓰려고 노력을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답답한 노릇이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또 나를 사로잡았다.




지난 글에서 만들었던 조립식 장난감을 해채 하고 새롭게 창작하며 만들면서 몸놀이 이외의 진지한 활동으로 아이와 마음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사심 담긴 대화를 시도했다. 겉보기에는 거의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지만 아이의 마음은 점점 깊어지고 복잡해져 어느 부분을 눌러야 소통다운 소통을 했다는 뿌듯함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요즘이라 뭔가를 함께 하는 시간은 아깝지가 않았다. 다행히 장난감은 중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고 꽤 오래 함께 놀 수 있었는데

갑자기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이가 탄!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인가. 나는 조립을 하다 말고 뿜어버렸다.


잇몸엔 이가탄! 붓고 시리고 어쩌고 저쩌고


생뚱맞은 광고 한편을 능청스럽게 줄줄줄 연기해대는데 누가 안 웃고 배기겠나. 깔깔대며 웃었더니 다른 광고가 이어진다. 텔레비전을 하도 봐서 광고가 외워졌을 리는 없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 때문에 주말에 할머니 집에서 한 시간 보는 게 고작인데 이가탄!이 아들 마음을 사로잡았나 보다. 내 웃음이 끊이질 않자 아들은 새로운 광고를 시도했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웃음은 금방 안 사그라들었다. 내 웃음소리에 자던 남편도 일어나 나왔다.


아들이 갑자기 또 말했다.

천지개벽할 말이었다.


엄마 나 글씨 공부 좀 하고 나올게!


대충 짐작이 갔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방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나 휴대폰으로 광고 좀 틀어줘. 소리만 들으면 돼.


곧이어 들리는 광고 소리. 열심히 받아 적는 아들 옆에서 아빠가 이때다 싶은지 맞춤법 교정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한참 후, 아들이 글씨가 잔뜩 적힌 종이를 들고 왔다. 내 앞에서 베껴적은 광고 대본을 보며 연기를 시작했다.

아이코, 아까처럼 빵 터지지는 않지만 안도감이 밀려온다. 글쓰기가 먼저가 아니었다. 사랑이 먼저였다. 내 웃음 한 번에 빽빽이 받아 적어온 광고글을 보고 있자니 우습게도 눈물도 날 것 같았다.




내 웃음이 시작점이었다는 것이 참 기쁘며 슬프다.

문득 영화도 떠오른다.

시작점을 찍기 위해 마지막에도 웃음을 남긴 아빠가 나오는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답다!

글쓰기는 내가 막 웃으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행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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