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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엄마 Mar 27. 2020

엄마, 그림책 있으면 집콕도 괜찮아.

그림책에 엄마의 향기를 입혀주자

그림책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을 만큼의 글밥 안에 두 명 또는 한 명의 작가가 자신만의 철학을 녹여낸 하나의 세상이다.

그 세상 안에는 독자가 전혀 기대한 적 없는 일이 있기도 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한 일들 또는 경험했던 일들이 고스란히 들어있기도 하다.

또 색다른 답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런 것들은 여기저기 숨어있기도 하므로 한번 읽어서 모든 것을 알아내기 힘들 수도 있고 독자는 그것을 영영 알아채지 못한 채로 책을 닫게 되는 일도 있다.

독자들은 저마다 그림책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보며 즐기는 것이다.

단, 예외의 독자가 있다.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기.


아기 독자는 자기 방식으로 그림책을 해석하지 않는다.

아기 독자에게 그림책이란 그냥 세상이다.

아기 독자에게 그림책이란 엄마 그 자체다.

아기 독자에게 그림책이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가지게 될 문제들을 조금 쉽게 풀 수 있는 커닝 페이퍼다.

엄청 거창한 듯하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어 유치원을 가기 전까지 나는 집에서 아이를 돌봤다. 그림책이 없는 집은 상상할 수 없다. 그림책은 내가 지칠 때 나를 도와주는 아이의 두 번째 엄마였다.

진짜 나들이를 하기도 했지만 여력이 안 되는 날은 그림책 속으로 무진장 여행을 많이 갔다.

나들이를 갈 때도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싸가야 하기도 했다. 그만큼 홀로하는 육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금의 집콕 사태에 조금은 익숙한 셈이다. (그래도 코로나 많이 밉다)


나는 그림책을 통해 엄마들이 아기에게 조금 더 넓은 세상을 선물하길 바란다.

이미 취향이 생겨버린 아이들은 엄마의 권유보다 자기가 궁금한 세상으로 눈을 돌린다.

그전에 엄마가 보여주고픈 세상을  충분히 보여주면 어떨까. (세 살에 꼭 읽어야 하는 책, 우리 아기 발달에 맞는 그림책 이런 거 말고, 아기가 봐야 하는 것이니까 그림이 알아보기 쉬워야 하고, 글자는 커야 하고, 색이 우중충하면 안 되고, 이런 틀은 잠시 밀어놓고!)

엄마가 알고 싶은 세상을 함께 알아가도 좋지 않을까.


유럽의 어느 서점에서는 진열할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새로울 것'이더라. 굉장히 쉽게 할 수 있는 생각 같지만 우리의 상황과는 정반대 아닌가. 우리는 새로우면 걱정이 앞선다. 고로 뭘 살 때는 검색해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봤고 추천수도 많은 걸 사지 않는가. 옆집 아이가 본 건 우리 아이도 꼭 봐야 하니까. 물론 대대로 물려받는 숫자 책이나 헝겊책이나 이런 것이 다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엄마 품 안에서 엄마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 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그 그림책에서 나는 향기로 알고 오래도록 간직하며 동심을 잃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아까 말한 숫자 책이나 헝겊 책에도 엄마의 향기가 가득 배어있을 것임은 틀림없지만 엄마가 아이 인생에 끝까지 함께 하도록 선물해주고 싶은 것이 숫자는 아닐 테니까.




나는 아이가 자라서 어떤 상황을 맞닥뜨려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만 있다면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오만 또는 시건방일지도 모르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버리는 동심만은 잃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그림책은 글밥이 적건 많건 초등학교 사 학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다. 이기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큰 이변이 없다면 버리거나 물려주지 않을 계획이다. 가끔 아이가 빛바랜 그림책을 혼자 읽고는 나이에 따라 다른 소감을 말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들이 어릴 때 병원 소아과 대기실에서 손주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시는 할머니를 관찰한 적이 있다.(사람 관찰은 잘못하면 뺨 맞기 좋은 습관이지만 잘 버려지지가 않는다. 재미있는 상황이면 더욱.)

할머니는 글을 한 단어씩 읽으셨다.

읽으시고 아기 확인.

할머니가 뭐라고 말했는지 질문.

아기는 아기둥절.

할머니가 재차 확인을 하면

아기는 딴 곳으로 기어가고

할머니는

'아유, 얘가 왜 이래? 이리 와서 들어야지.'

아기는 뽈뽈뽈

아기는 결국 아들에게 책 읽어주는 내 옆까지 여행을 왔다.

내 아들은 '내 엄마야.'라는 뜻으로 방어 시작.

아기는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고 내 이야기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결국 할머니에게 안겨 그림책에 나오는 숫자랑 글자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빠져나가려는 아기를 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시고

'아유, 얘가 왜 이럴까?'

하셨는데

차마

할머니가 책을 너무 가르치듯 읽으셔서 그래요. 확인하지 말고 그냥 읽어줘 보세요.라고는 말씀을 못 드렸다.




아이가 자라면 부모가 울부짖는 것이 스스로 학습 아닌가. 그림책이 학습 도구로 쓰이고 있는 현장 또한 가슴이 아프다.

학습은 아이가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굳이 아이가 그 책을 꼭 읽어달라는 취향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림책은 그저 엄마와 모험을 떠나는 정도로

할머니가 안 가본 곳을 소개하는 정도로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을,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정도로

함께 즐긴다면

아기는 아이가 되고 어른이 되어

그때 그 향기를 찾아 그림책을  펼치고 뭐든 훌훌 털어버리지 않을까?




<파도가온다>​에도 엄마들의 향기가 듬뿍 담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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