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는, 현실에 찌든 지금과는 달리,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TV에서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때면, 초원에서 사자가 얼룩말의 목덜미를 무는 장면을 본 나는 내 목이 물린 것마냥 엉엉 울곤 했다. 최상위 포식자든, 가축이든, 힘없는 초식동물이든, 전기톱날에 쓰러져 가는 나무든,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견딜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벌하고 귀여운 포식자와 함께 살고 있다. 매일 저녁, 3살짜리 고양이를 위해 닭고기로 만든 츄르를 꺼내고, 참치 캔을 딴다. 닭과 참치 역시 한때는 심장이 뛰던 생명이었으나, 나는 내 고양이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죽음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소비한다.
나는 쥐 모양의 낚싯대를 흔들며 녀석의 사냥 본능을 자극하고, 녀석이 인형의 목을 물어뜯는 살생의 시뮬레이션을 보며 "아이고, 우리 고양이 사냥도 잘하네!"라며 물개박수를 친다. 내 가족의 배부름을 위해 다른 생명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일상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것이 동물 다큐를 보며 울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실천 중인 '생명사랑'의 실체라니.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며칠을 굶은 듯 앙상한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마주쳤다. 녀석의 야윈 등뼈를 보는 순간, 우리 집 고양이가 겹쳐 보여서 연민이 솟구쳤다. 나는 집에서 츄르 하나를 가져와 녀석에게 내밀었다.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했고,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서 뿌듯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뿌듯함을 넘어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이 차오르려던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한 생각이 내 뒤통수를 쳤다.
이것은 선행인가, 위선인가. 나의 이 행위는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이며, 오만한가.
냉정하게 따져보자. 나는 오늘 이 고양이에게 츄르 한 줄을 제공함으로써 녀석을 구원했는가? 아니다. 녀석은 내일 다시 굶주릴 것이다. 오늘의 포만감은 어쩌면 내일 찾아올 더 큰 공복감을 돋보이게 할 잔인한 희망 고문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역겨운 것은 나의 ‘선택적 연민’이다. 나는 왜 눈앞의 길고양이에게만 가슴 아파하는가? 방금 뜯어준 그 간식 속에 갈려 들어간 닭과 소, 그리고 지금도 내 발밑 보도블록 틈새에서 밟혀 죽어가는 개미들에게는 왜 눈물 흘리지 않는가.
단지 내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귀엽게 생겼다는 이유로 내 연민의 대상은 철저히 편파적이었다. 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 취향에 맞는 생명’에게만 동정을 베풀고는, 그것을 '윤리'라고 착각하며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딜레마는 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국 내린 결론은, 내가 ‘신’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 지구적 박애주의를 실천할 능력도, 마블 영화 속 히어로처럼 모든 생명의 무게를 짊어질 그릇도 못 되는, 그저 닭고기 캔 가격 인상에 일희일비하는 간사한 소시민일 뿐이다.
즉, 이 거대한 모순 앞에서 나의 비겁함을 받아들이고 나만의 선을 긋는 것이었다. 어설픈 위선보다는 솔직한 한계를 택하기로 했다.
나는 이것을 '책임의 반경'이라 부르기로 했다.
나는 세상 모든 고통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니 애써 전지전능한 척,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척하며 '방구석 철학자'처럼 괴로워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내 팔이 닿는 거리,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만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책임을 지겠다. 내 집 안의 고양이, 내 곁의 가족, 내가 지킬 수 있는 친구들. 이 좁은 반경 밖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나는 여전히 안타까워하겠지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쓰레기'라고 몰아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너만 잘 먹고 잘 살면 다냐?"라고. 하지만 자신의 능력 밖의 일까지 책임지려 드는 설익은 정의감이 때로는 더 큰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감당하지도 못할 길고양이를 데려와 좁은 방에 방치하거나, 세상 모든 불행을 짊어지려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보다는, 내 좁은 반경 안의 생명이라도 확실하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모순덩어리다. 내 고양이를 위해 닭을 희생시키고, 길가의 비둘기보다는 길고양이에게 눈길을 더 준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행동을 하며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야"라고 자만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것이 내 그릇의 크기다"라고 담담히 인정할 뿐이다.
자신이 감당가능한 책임의 반경을 명확히 하고, 그 안의 것들을 열렬히 아끼는 것. 그것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인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죄책감에 질식하지 않고, 나만의 윤리를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