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단단한 갑옷 속 세상

by 김이밤


리빙 레전드와의 대화


우리 할아버지는 살아있는 인간 승리의 표본이시다. 부모님도, 돈도, 빽도 없는 고아로 시작해 맨땅에 헤딩하듯 자수성가하셨다. 그 험난한 시절에 기어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업까지 성공적으로 일구셨으니, 할아버지는 우리 가문의 자랑이자 나의 영원한 롤모델이시다.


하지만 명절날, 롤모델인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종종 스킵 버튼 없는 유튜브 광고를 보는 것 같은 인내심 테스트로 변질된다.


“너 이번 주 교회는 나갔니? “

“배우자는 무조건 교회에서 만나야 한다. “

“취직 준비는 잘 돼가니? “

“기술이든 공부든 딱 한 우물만 깊게 파서 장인이 돼야 성공하는 거다. “


물론 짧은 식견을 가진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감사한 조언들도 많지만, 이 대화에 내 의견이 들어갈 틈은 바늘구멍보다 좁다. 내가 "요즘은 시대가 좀 변해서요..."라고 운을 떼려 하면, 할아버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신의 80년 인생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반박 불가 논리를 펼치신다. 마치 입력된 알고리즘대로만 출력하는 NPC와 대화하는 기분이랄까. 존경심과 답답함이 9:1 비율로 섞인 미묘한 감정 속에서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신과 굳어짐 사이


나는 종종 두렵다. 나도 나이가 들면 ‘확신의 감옥’에 갇히게 될까 봐. 귀는 닫히고 혀는 딱딱해지며, 내가 평생 쌓아온 신념만이 절대적인 정답이라 우기는 그런 어른이 될까 봐. 젊은 세대는 흔히 그런 모습을 보며 "꼰대가 되었다"며 혀를 찬다. 그런데 문득, 할아버지의 저 단단한 고집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안에는 어린아이처럼 웅크린 원초적인 두려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왜 나이 들수록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는가. 나는 그것이 다가오는 '소멸'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다. 그 거대한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순간,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은 '내가 살아온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뿐이다. 만약 생의 마지막 챕터에서 "내 선택이 틀렸나?", "나는 헛살았는가?"라는 의심이 든다면, 그 공허함은 죽음 자체보다 더 끔찍한 형벌일 것이다.


젊은 우리는 실패해도 "아님 말고"라며 다시 시작할 시간이 있다. 하지만 노년에게 자신의 신념을 부정당하는 것은, 곧 지나온 인생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그들은 타인의 반박을 견디지 못한다. 내 말이 틀렸다는 손자의 가벼운 지적조차, 그들에게는 평생 공들여 쌓아 올린 삶의 탑을 무너뜨리려는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노년의 고집은 남을 이기기 위한 창이 아니라, 무너져내리는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급하게 두른 갑옷이다. "내 말이 맞아!"라는 고함은, 사실 "제발 내 삶이 의미 있었다고 말해줘"라는 간절한 인정 투쟁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팬


이렇게 생각하니, 핏대를 세우며 설교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예전처럼 마냥 답답하지만은 않다. 그분의 고집 뒤에 숨겨진 연약한 등을 본 이상, 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대화해야 할 것 같다.


할아버지의 갑옷을 굳이 벗기려 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반박해서 이기는 것보다, "할아버지가 그때 그렇게 버텨주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편해요"라고 그 치열했던 과정을 인정해 드리는 것. 그것이 그분의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확실한 진통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나이가 든다는 것이 '정답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틀릴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 되도록 신경 쓰려한다. 내 경험이 전부가 아님을, 내 시대의 상식이 다음 세대에는 비상식이 될 수 있음을 쿨하게 인정하는 유연함. 그것이 늙음이 추함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부제다.


저녁에 오랜만에 할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이번 대화 역시 할아버지의 조언들로 가득했지만, 이번엔 당신의 설교를 듣는 방청객이 아니라, 당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팬으로서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그때 진짜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버티셨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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