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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un 13. 2019

그럼에도 세상을 사랑하는 법

우울해도 괜찮다. 이런 나라도 괜찮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나를 지우는 거다. 


잊고 있었다. 나라는 그 자리를 지우면 텅 빈 그곳에 아픔도 슬픔도 그저 지나갈 따름이다. 어떤 심각하고 괴로운 일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주인 행세하지 못한다. 그 괴로움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내가 없다면 말이다.



거짓말을 했다. 그만둔 직장 동료들이 고맙게도 또다시 저녁 모임에 나를 불러줬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가고 싶지 않았다. 가서 들을 회사 욕에 맞장구쳐 줄 기력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잘 지내는 척하기가 괴로웠다. 분명 가서 그들을 만나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이렇게 우울한 상태로는 만나지 못하겠다. 그래서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괜찮은 척했다. 밝고 잘 지내는 척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를 내지 않고 그러는 척은 꽤 쉽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은 한 움큼 우울이 드러 앉았다. 


오늘도 꽝이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했다. 여전히 별로인 이 기분. 어제와 오늘이 그다지 다를 거 없다는 예감. 그 와중에 몹시 배가 고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우울하다며 시위하는 나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자책하는 내가 싸우고 있는 걸 다른 사람처럼 지켜보았다. 해야 할 일을 억지로 꾸역꾸역 하다가 핸드폰의 통화버튼은 도저히 누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 아저씨에게 집을 뺀다는 말을 하기가 몹시도 두려웠다. 화장실의 콘센트를 새로 갈아 끼우려다가 망할 구멍이 좁아 5분이면 끝났어야 할 새로운 콘센트 달기에 실패했고 급한 대로 테이프로 막아놨다고 고백할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날에 B사감 같은 집주인 아저씨의 음성을 듣고도 괜찮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그 두려움을 말하고 요새 내가 우울하다고 말했다. 남자 친구는 다시 한번 구멍이 작은 콘센트를 찾아 달아 보겠다고 나를 위로했다. 나는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나오는 채로 아저씨한테 콘센트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합리화를 열심히 했다. 


우울했지만 우울감에 이 여자를 방치해 둘 순 없어서 집을 나왔다. 밥을 먹고 중고서점에 1년 넘게 휴재 중인 예전에 좋아했던 웹툰을 팔았다. 아끼던 책이라 최상으로 분류되었다. 예전에 자주 가던 도서관에 가는데 엄청 더워서 땀에 옷이 다 달라붙었다. 이런 날씨에 거리를 쏘다니면 쓰러지는 게 아닐까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현실을 잊을 소설이 필요했다. 읽고 싶은 소설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읽으려고 했는데 의외의 방해꾼이 있었다. 도서관 직원들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도서관에 방문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매우 어색한 기운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그들의 말에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책을 한 권 더 골라 대출한 후 집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에어컨이 없었고 여전히 더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 덥다는 생각만 났다. 아니 덥고 난 우울하구나. 집으로 다 올 때쯤은 덥다는 생각이 이겼다. 집에 가자마자 옷을 벗고 선풍기 바람을 2단으로 올렸다. 살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 사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김태호 PD가 만든 유튜브를 켰다. 배우들이 시답잖은 내적 흐름에 따른 대화를 하는데 갑자기 유쾌해져 버렸다. 낄낄거리다 보니 정신이 조금 돌아온 기분이 든다. 


어제 어떤 분이 말씀해주신 명상 유튜브를 기웃거리다. 영상 4편 정도를 보게 되었다. '참나'와 '에고'와 관한 글로 인상이 너무 선하고 평온해 보였다. 머리를 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왜 우울할까? 답을 찾기도 귀찮았지만 알고 있다. 그대로인 것 같아서 변한 게 없어서 괴로운 거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호기롭게 제대로 살아보자 했는데 또 똑같이 살고 있는 게 무척 괴로웠다. 나는 무기력 버전의 내가 싫다. 그런데 나는 진정 원하는 게 아니면 쉽사리 무기력해지곤 했고 그게 잘 안될 때면 모든 걸 한 번에 놓고 싶어 했다. 겁쟁이다. 그러다 보면 끝도 없이 자신이 싫어지고 사는 게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뭐 그게 왜 괴로울까? 나는 멋진 에고를 가지고 싶었다. 남들의 인정보다도 나에게 인정을 받는 에고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 나의 인정은 남들의 인정을 토대로 무의식 속에 사회화한 에고다. 그게 제일 어렵다. 내 건 줄 알아서 협의가 잘 안되고 끝도 없이 이상이 높다.


에고는 내가 아니다. 끊임없이 불평을 말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우울해하는 불만투성이 에고는 사실 내가 아니다. 그걸 들으니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우울하고 수많은 단점이 있어도 정신승리를 안 해도 괜찮다. 그건 어차피 내려놓고 비워내야 하는 거다. 그걸 다 비우면 사랑으로 가득 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 그 자체가 된단다. 


저거다. 내가 해야 할 게 저거다.


참나는 직관이고 내 마음의 소리이며 모든 정답은 내 안에 있고 직관에 내린 결정은 불안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 거 느껴본 적이 있던가... 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도 불안하지 않던 때... 명상을 해야겠다. 그리고 글을 써야지. 그리고 요가. 아프다고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그 시간이 나는 좋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놀랍게도 세상에 조금 더 사랑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성이 잡혔다. '판단하지 말자.' 오늘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해본다. 그리고 여유가 되면 성장하려고 해 보자. 남들 사회가 원하는 성장 말고 그냥 한 뼘 더 좋은 사람,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그런 성장. 에고는 버리자. 에고랑 사는 건 지긋지긋하니깐.


그리고 이번엔 기록해보자. 나아진 것 같으면서도 다시 그 자리인 기분이 드는 건 어쩌면 기록을 놓쳐서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렇게 우울하고 괴로워하는 내가 평화를 찾으면 누군가에게 큰 힘이 아니 찾지 못하면 이런 인간이 또 사는구나라는 위안이 될지도 모르니깐.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사람이 만나고 싶어 진다. 다시 책을 열심히 읽고 영화를 보고 세상을 알아가고 싶다.



P.S. 이 글을 쓰는 건 에고일까? 참나일까? 에고의 시선을 빌린 참나일까?.. 그건 내가 좀 평온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변덕을 부렸는지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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