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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un 14. 2019

소개팅으로 만난 게 아니라

그냥 어느날 우연히 만났어

지금의 남자 친구를 랜덤채팅으로 만났다. 


내 말을 곡해 없이 들어줄 친한 지인에게는 그 사실을 말했고 나를 걱정할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소개로 만났다고 둘러댔다. 남자 친구는 아마 누구 물어보면 소개로 만났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달의 중순쯤 우리는 곧 4년 차 커플이 된다. 그리고 두 달 후면 결혼한다. 

자정쯤 잠이 안 와 뒤척이며 처음 만나던 날을 이야기했다.


"너는 언제 나랑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카페에서 처음 봤을 때"

"진짜? 전혀 그런 분위기 아니었잖아."




그를 만날 즈음 나는 사랑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한 없이 외로웠다. 친구가 필요했다. 애인이 아니라 너무 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느슨하고 담백한 친구. 서로 바라지 않고 아무 이야기나 해도 괜찮을 사람. 그래서 그 날 랜덤채팅을 했다. 


아마 세 시간 넘게 채팅을 이어갔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거칠 것 없는 대화였다. 남자 친구의 소개팅 실패담과 내가 왜 지난 사랑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서로의 과거를 탈탈 털어놓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편안했다. 그는 이야기를 참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때도 확신은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리고 나도 그에게 상처 줄 리 없을 거라는 확신. 그래서 고민 없이 카카오톡 아이디를 가르쳐 주었다.


한 달쯤 지나 우리가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 친구에 의하면 2주 정도만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집 근처에서 볼 일이 있었고 2시간쯤 붕 뜬 시간이 있었다. 그의 만나자는 제안에 별 고민 없이 나갔던 건. 당연히 한 번쯤은 봐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는데 그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엄청 떨렸다. 나는 기도했다. 


'제발 이상한 놈이 아니게 해 주세요.'


딱 처음 그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그의 인상은 선하고 밝았고 온몸으로 좋은 사람임을 내뿜고 있었다. 역시 안전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를 남자로 생각하진 않았다. 그때 애인은 필요 없었고 당분간 이별이 하기 싫었으니깐.


대화는 참 좋았다. 별 말하지 않았는데 그와 있을 때 편안해서 좋았다. 원래 알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고 약속했던 2시간이 훌쩍 지나 그는 저녁 약속에 가야 했다. 생각나는 건 그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10분 만에 빨대로 쪽쪽 빨아 마셨던 것. 그게 좀 충격적이었다. 아주 맛있게 먹는 것 같아 한 잔 더 주문할까 고민마저 들었다. 그는 괜찮다면 물을 한 컵 마셨다. 아주 빨리


다시 지하철 역에서 헤어졌다. 나는 룰루랄라 기쁜 마음으로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만나도 기 빨리지 않는 사람을 한 명 더 만났다. 


3시간쯤 지나 그가 다시 나올 수 있냐고 물었고 어차피 망한 하루 좀 더 놀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 근처 작은 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아주 오래. 그리고 그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꼭 좋은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될 것 같으면 사귀자는 말을 하거나 듣게 된다. 나는 그에게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경고 사인을 주었다.


"정신 차려! 나는 지금 남자를 만날 상황도 아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난 외국에 가고 싶다고. 한국에서 살 생각이 없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 복잡한 사람이란 말이야. 나랑 엮이지 마. 빨리 도망쳐!"


그는 곱게 미소를 지고 있었다. 그리고 밀어내는 나를 와락 안았다. 


"그래도 나는 너를 만나고 싶어. 네가 떠나야 한다면 그때까지만 만나도 좋아. 나는 그냥 지금 너랑 만나면 행복해질 거야. 미래의 일은 미래에 고민해 보자."


하루정도 고민했지만 결국 그를 만났다. 나는 확신 있는 사람에게 약했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그리 될 줄 알았다. 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랑을 덮어 두고 떠나지 못한다.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 상상과 가설로 만족할 수 없다. 책은 한 번 펼치면 아니 꽤 재밌어 보이는 책이 있으면 끝까지 읽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때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를 만나면 내 삶이 통째로 바뀔지도 모른단 걸. 한국에서 떠나지 못하고 안정적이고 따뜻하고 안락한 일상을 추구하게 될 것이란 걸. 그래도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첫 만남이다.




"그랬지. 저녁 약속에 갔는데 집중이 안 되더라고.  너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연락하고 있었어. 카페에서 뭔가 내 감정이 증폭되었어."


"와, 너 그때 카페에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는 네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지도 몰랐어."


"티가 안 나나 봐."


"설마.. 그때 우리가 결혼할 거란 것도 알았어?"


"결혼해도 좋을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어. 결혼하면 참 좋겠다."


"말도 안 돼!"


"금사빠인가 봐."


대체 나의 어떤 모습이 그리 좋았냐는 내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던 그가 해준 답은 이렇다.


내가 깨어있는 여자라 좋았단다. 자기가 세상 살면서 만났던 여자의 한 지평을 넓혀주었다고. 바다와 같이 열린 사람이라고 그래서 엄청 특별했다고.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내가 알아들은 건 사치가 없고 경제관념이 올바르다는 것 정도(회사가 싫다고 그만두는 건 함정, '난 암호화폐를 질렀는걸? 그 정도 쯤이야 그럴 수도 있지') 대체 전에 만났던 여자들은 어땠길래,  만난 여자가 얼마 없는 게 아니야?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지만 순간 우쭐해졌다. 


세상 쓸모없지만 그거 빼곤 나도 참 괜찮은 사람이야. 


사람과 사람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했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란 신호를 보낼 수 있었고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다. 눈 앞에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내가 기특한 지 자주 복을 받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인연이 찾아오는 복. 그래서 그를 만난 게 참 감사하지만 그렇게 신기하지 않는다. 랜덤채팅의 기막힌 알고리즘이었다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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