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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y 12. 2020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디씨엠브레

일상 속 특별한 공간이 주는 힘

출처: 디씨엠브레


와하까의 한인 여행자들은 디씨엠브레에 묵는다.


 디씨엠브레에 묵기로 택한 건 숙소가 깔끔하고 청결하다는 평판 때문이었다. 덧붙여 사장님이 친절하고 맛있는 조식, 그것도 한식을 준다니 묵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무렵 와하까에 들리는 한국 사람들은 거의 다 디시엠브레에 묵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한인 숙소라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여행 정보를 얻기도 쉽고 한국 사람이 반갑기도 했지만 이왕 여행을 하는 김에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고 현지 문화를 체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무리 생활은 질색이었고 술도 먹지 못하는 내가 왠지 끈끈한 정으로 뭉친 한국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으면 소외되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와하까에 도착한 건 해가 완전히 진 저녁과 밤 사이었다. 멕시코 버스는 걸핏하면 지연이 되었고 도착하기로 말해 둔 시간보다 3시간이나 늦었다. 희미한 가로등이 밝히는 거기서 거기로 보이던 주택가 골목을 빙빙 돌았다. 땀에 절어 배낭을 메고 한참 후 통창이 보이는 묘한 공간을 발견했다. 눈에 띄는 간판은 없었지만 보는 순간 여기가 '디시엠브레'구나 안심이 들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사장님, 투숙객들과 함께 막 저녁식사를 차린 직후였다. 사람 좋은 미소로 같이 저녁을 먹자는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고 E언니와 나는 따로 식당을 찾았다.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이 되고 싶지 않았다.


거리 곳곳에는 일주일 전 있었던 '죽은 자의 날(Dia de Muerto)'을 기념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가게 사이 작은 공간을 맵시 좋게 매운 더 작은 해골과 금잔화 꽃잎. 한 시간의 밤 산책이면 충분했다. 와하까가 아름답다는 걸. 와하까는 사랑에 빠지기 쉬운 도시란 걸. 나도 예외는 아니라는 걸. 그러나 그때까지도 와하까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 중 팔 할이 디시엠브레가 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일상이란 단어가 녹아든 도시


햇살 좋은 봄 날씨, 끝내주게 맛있는 수제 치즈, 매일 우유에 타 먹던 수제 초코라떼, 시장 좁은 구석에 앉아 먹던 약간 질긴 숯불고기와 구운 고추, 식물원 같던 도서관, 아기자기했던 우체국 박물관, 당근 케이크가 맛있던 카페, 그 앞에서 결혼 화보 촬영을 하던 커플, 숙소 옆 공원과 공원에서 쉴 새 없이 놀던 아이들, 그 공원과 길가 사이 줄 서서 먹던 또르따, 어떤 메뉴가 나올지 설레게 했던 오늘의 메뉴를 팔던 식당, 그라피티가 가득한 벽, 아이스크림을 팔던 광장, 정중앙에 있던 이름 모를 박물관, 색색깔의 과일과 채소가 가득 찼던 시장, 주말 저녁 잔뜩 쏟아지는 사람들과 때때로 열리는 버스킹, 밤이 돼도 무섭지 않던 거리


 와하까를 떠올려봐도 거창한 추억 같은 건 없다. 대단한 관광지나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을 본 것도 아니었다. 딱히 기억에 남는 누군가를 만난 것도 아니었고 특이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었다. 와하까에서의 나날은 그 어떤 곳보다 일상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그토록 충만하게 다가오고 행복에 가득 찼던 일상은 없었다.


아니, 정말 특별했다. 내 생애 다신 없을 희귀하고 소중한 빛나는 순간이었다. 매일매일이 완벽한 일상이라는 걸 배경 속 등장인물일 때도 알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노래를 듣고 있더라도 불안하지 않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내일 뭐하지란 고민에 답이 없어도 큰 자극이 없이도 다른 하루가 이어졌다. 미래를 떠올리지도 않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


디씨엠브레라는 특별함은 결국


곱씹어보면 와하까에 디씨엠브레가 있었기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함이었다. 처음 디시엠브레는 좋은 숙소에 지나질 않았다. 하루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면서 디시엠브레는 사장이었던 세경 오빠와 혜윤 언니가 완전히 녹아든 공간이란 걸 알게 되었다. 오빠와 언니는 누구보다도 와하까를 찾은 여행자들이 아낌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바랐다. 편안히 잠을 자도록 폭신한 베개와 깨끗한 이불을 계절별로 준비하고 햇볕에 말렸다. 옥상에 캐노피를 힘들여 설치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공간을 만들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출처: 디씨엠브레


언니는 손님들을 위해 고추장아찌를 담가놓았다. 매일 다른 메뉴를 개발하고 맛있다고 말하면 기쁨이 가득한 얼굴을 보여줬다.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파니니를 준비하고는 인형 사이에 맛있게 드세요란 귀여운 메모를 끼어놓는 센스 있고 배려있는 사람. 오빠는 매일 새로 온 손님이 올 때마다 지치지도 않는지 지도를 나눠주고 가보면 좋을 곳, 맛있는 음식점, 카페, 술집 등을 소개했다. 지겨울 만큼 반복되는 대화에도 지치지 않고 늘 같은 어조와 억양을 사용했다.  


세경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사람이었고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까지만 성큼 다가가고 불편해질 만한 질문을 건넨 적이 없었다. 함께 있는 시간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혜윤 언니는 낯을 가리지만 친해지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고 정을 주는 사람이었다. 오래 보면 볼수록 느껴졌다. 언니와 오빠는 결코 손님들을 객체로 전락시킨 적 없었다. 한 명 개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더 많이 주고자 했다.


디씨엠브레에서는 모든 투숙객이 매일 저녁을 함께 먹었다. 3-4일에 한 번씩 모이는 사람들이 달라지는데도 디씨엠브레 다운 분위기는 일관적이었다. 따뜻하고 유머스럽고 모두에게 열려있고 사람 냄새 가득해서 거기 있으면 서로 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밤 술도 못하면서 누구 하나 잡은 적 없는데 가장 오래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디씨엠브레를 통해 알게 되는 사람들과는 좀 더 깊고 마음속 얘기를 꺼내는 게 쉽고 즐거웠다.


그날 여행이 별로라도 조금 기분이 상하는 문제가 생길지라도 와하까에서만큼은 저녁에 투정 부릴 수 있는 내 편 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정 애착을 가진 아이처럼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디시엠브레 덕분에 낯선 세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모르는 사람도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지치고 힘들면 돌아올 곳이 있었다.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행자였고 생업과 떨어져서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그 공간에서 그리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년간의 여행 동안 내게 디씨엠브레 같은 곳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숙소로서 더 많은 장점을 가진 곳 더 아름답고 힙한 인테리어를 갖춘 곳은 있었지만 공간의 마법에 이끌려 여행 경험이 변하고 관계가 넓어지는 그런 마력이 있는 공간을 나는 여행에서도 돌아와서도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그 마법 같던 디씨엠브레의 역사를 모두 알지 못하고 언니 오빠가 했던 노력의 1/10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런 언니와 오빠가 만들었기에 진심이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공간이기에 그 시절 디씨엠브레가 있었고 디씨엠브레를 묵었던 모든 사람은 디씨엠브레를 사랑했을 거란 거다.


지금의 나의 일상에 디씨엠브레가 함께였다면 나는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열려있고 조금 덜 슬퍼했을 거다.

닭살 돋고 느끼한 소리를 잘하는 나는 그때도 어느 정도 내 마음을 표현했다. 얼마나 디씨엠브레를 좋아하고 감사하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러나 그걸로도 부족하다. 내게 온전한 따뜻함과 행복감을 만들어 준 신기하고 매력 넘치는 공간의 힘을 느끼게 해 준 디씨엠브레 그립고 사랑한다.


디씨엠브레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멋진 공간은 누군가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줄 만한 힘이 있다는 걸. 공간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는 거. 우리 곁에 디씨엠브레가 많아지길 바라며 언젠가 나 또한 그런 멋진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



P.S 언니와 오빠는 디씨엠브레를 정리하고 지금은 제주도에서 'Las Tortas'라는 타코 집을 운영하고 있다. 언니와 오빠는 그대로였고 손님들에게 맛있는 걸 먹이려는 마음가짐도 그대로였다. 아 오빠의 유머감각과 언니의 따뜻한 음성까지도. 그 타코 집이 서울에 있었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했을 텐데 더 자주 가지 못해 아쉽다. 우리 언니 오빠 뭘 해도 잘 될 거다. 너무 멋진 사람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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