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또 하나의 편견이 깨졌다.
그 일은 며칠 전 시작한 마케팅 교육 셋째 날에 일어났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을 위한 디지털마케팅 콘텐츠 크리에이터 국비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22명의 수강생, 수업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는 우리는 서로의 첫인상조차 눈빛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도 자기소개를 하는데 유독 눈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몇 살인지 모르겠고 얼굴도 보이지 않지만 나와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밝은 색 재킷을 입은 그녀는 연극영화과를 나오고 유튜브 등에 출연은 해봤는데 마케팅이나 콘텐츠 기획을 직접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사정이 궁금하면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앞에 나가면 벌벌 떨며 긴장하는 나와 달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즐기는 그녀는 완벽히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셋째 날은 자리를 정하는 시간이었다. 일찍 온 순서대로 원하는 자리에 앉기로 했다. 오른쪽 세 번째 줄 자리를 잡았다. 점점 사람들이 도착하고 자리가 채워졌지만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녀가 들어왔고 나는 내심 그녀가 옆에 앉길 바랐지만, 그녀는 나를 지나쳐버렸다. '혼자 앉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잠시 후 눈이 마주친 그녀가 조심스럽게 '거기 자리 비워있나요?' 물었다. 1초의 틈도 없이 '네! 비어 있으니 여기 앉으세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그 자리도 열심히 청소하지 않았냐는 나의 실 없는 농담에 사심 없이 웃는 그녀를 보며 내심 생각보다 편안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페이스북 수업을 하면서 그녀의 아이디를 알게 되었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녀가 배우이거나 뮤지컬을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녀는 아이돌이었다. 마스크를 벗은 사진과 동영상 속 그녀는 끼가 넘치고 춤을 잘 추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팬이 많았다. (여신이라고 하면 그녀는 손사래 치며 질색을 하는데 외모에 관해 평가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돌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지나가면 누구나 쳐다볼 법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연예인에 별다른 관심도 없고 하다못해 누구의 팬 활동 한 번 해본 적 없는 나는 내 주변에서 아이돌이나 아이돌 지망생을 본 적조차 없었다. 나와 그녀는 그동안 살아온 세계가 전혀 겹치지 않을 만큼 다른 생을 살아왔을 게 자명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5일이 채 안 되는 시간 어떤 관계보다도 더 빨리 그녀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완전히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가진 직업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다. 연예인으로서의 그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인간적인 매력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았다.
그녀는 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화술이 뛰어났다. 조리 있고 센스 있게 막힘없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고 목소리 또한 사람을 집중시켰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순발력. 쇼핑에 관심 없던 나조차 재밌게 들을 수 있던 그녀의 스피치. 자신감 있고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화술은 그 자체로도 멋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부러운 능력이기에 동경하는 마음도 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굿 리스너'란 사실이 놀라웠다. 단순히 공감을 잘하고 말을 잘 들어주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을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을 단계적으로 했다. 그래서 자꾸 마음을 열게 하고 개인적이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되었다. 정말 이상한 건 그 과정에서 조금의 부담이나 불안감 같은 걸 느끼지 못했다는 거다. 사람의 속사정과 감정을 담백하게 이끌어내서 대화 내내 즐거웠다. 알맹이가 있는 대화랄까. 말을 계속 이어나가려고 억지로 대화하는 기분이 아니라 나에 대한 궁금함과 관심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런 대화를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과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나를 보며 신선하고 생경했다.
나보다 더 흥미로운 경험도 많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났을 거고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을 그녀는 내 이야기를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알고 싶어했다. 내게 어떤 빗장도 걸지 않고 다가와주는 사람. 그럴수록 나는 그녀가 더 궁금했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우리는 간식을 나눠 먹고, 작은 선물을 주고받고, 수다를 떨고 교육이 끝나면 함께 정류장에 가서 같은 버스를 탔다. 어떤 날은 장마처럼 폭우가 쏟아졌고 작은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고는 잔뜩 젖어 깔깔거리기도 했다. 그날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계속 비집어 나와 샤워하는 내내 피식거렸다. (나는 비와 인연이 있나 보다) 그녀는 내가 쓴 책을 읽었고 나는 그녀의 영상을 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깊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수업 도중에 슬쩍슬쩍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혀 달라 보였던 우리가 생각보다 굉장히 닮은 사람이란 걸 발견했다. 선이 굉장히 강해서 그걸 넘어오면 견디지 못했던 것도 닮았고 무언가 외로웠던 기억, 의외의 성실함(하하), 20대 후반 갑자기 감정통제도 안 되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경험도. 사랑을 사랑하는 것도. 배려하는 성향과 감정이 풍부하고 쇼핑에 별 관심이 없는 것까지 말이다.
그녀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그동안 일을 하며 너무 지쳤고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마음을 닫고 살려고 했는데 언젠간 내가 해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에게 마음을 닫지 말아달라. 좋은 사람들은 계속 찾아온다.'는 말이 큰 힘이 되고 마치 자기 속마음을 알고 말한 것처럼 신기했다고.
나 역시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여전히 지레짐작하며 사람을 판단하고 유형으로 분류해버릴 때가 많았다. 그러지 말자고 해놓고도 판단해버렸다. 이렇게 보기 좋게 나의 편견을 부숴 주어서 고맙다고. 내게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고 자신을 보여줘서 감사하다고. 그녀 덕분에 친해지기 어려워 보이거나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에게도 마음을 닫지 않고 다가가게 되었다고. 그녀만큼 좋은 사람일지 모르니까.
내 옆자리 우연히 그녀가 앉게 되었고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나와 그녀는 세상 모든 일에 우연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서로의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계속 차지하고 응원해주는 질긴 인연이 되길.
P.S. 그녀와 훠궈를 먹으러 가는 날이 무척 기대된다. 난 한 번도 훠궈를 먹어보지 않았고 훠궈는 그녀의 최애음식. 아마 난 전날부터 설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