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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Nov 27. 2020

L은 TV를 잘 보지 않는다.

L은 TV를 잘 보지 않는다. L은 무언가를 정주행하지 않는다. L은 내가 넷플릭스를 중독자처럼 12시간씩 보는 행위를 늘 우려한다. 종종 '뭐해?' 카카오톡을 보내 원거리 감시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함께 앉아 TV를 보며 식사를 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가끔 L이 장난감을 쫓는 고양이 혹은 광고 화면을 보고 넋이 나간 아이처럼 느껴진다. 일단 무언가를 틀기 시작하면 L은 좋아하지도 관심도 없던 화면에 정신을 팔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그렇듯 그는 멀티태스킹에 서툴다. 그는 TV앞에서 좀처럼 딴짓을 하지 못한다. 



아예 TV를 꺼버리거나 방문을 닫아 다른 공간을 만든 후 원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정신없이 떠드는 TV소리와 무언가를 택해야 할 때 중요도나 선호도에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늘 영상이 승리하는 사람이다. 




보통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운전하는 중간 중간에도 대신 인터넷을 검색해달라고 조르는 호기심왕 L이 어떻게 쫄깃한 다음화 예고를 보고도 다음화를 안 보고 멈출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L또한 나처럼 정주행을 즐기며 넷플릭스 중독자가 되기로 용인하는 사람이었으면, 그야말로 L은 누구보다도 지독한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합리적인 가설은 멀미다. 워터파크 잔잔한 파도 유수풀에서도 멀미를 느끼는 그가 영상을 오래 보다보면 멀미를 느끼는 신체적 악조건을 타고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새 나는 '오렌지이즈더뉴블랙'이라는 미드에 푹 빠져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에세이를 각색한 작품으로 중산층 백인 여성이 10년 전 벌인 마약 운반 혐의로 교도소로 가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내가 봤던 어떤 영상물보다도 폭력적이고 야하며 직설적이고 무자비하며 현실적이고 흥미롭다. 주위를 오고 가며 우연히 몇 장면을 슬쩍 훑어보던 L은 '세상에!! 저런 극악무도한 드라마를 보다니!' 어르신처럼 혀를 끌끌 찼다. 





L은 머리를 써야 하거나 심각한 주제의 영상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인터스텔라, 동물 다큐나 OST가 좋은 음악 영화, 액션, 마블 히어로가 등장하는 해피엔딩 영화를 좋아한다. 사회 문제를 들쳐내거나 보고나서 며칠밤 머리를 어지럽힐 혼란과 여운이 남는 영화나 드라마를 극히 꺼린다. 그러면서 뉴스를 열심히 본다. 뉴스는 보지만, 그것이 알고싶다나 르포 고발 프로그램은 보지 않는다. 




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의 내러티브는 극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무자비하게 꼬집는 영화이다. 외부 조건과 환경에 따라 사회적 문화가 변화하거나 인간의 내면을 깊이 고찰하는 장면이 주로 쓰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머리 아프고 여운이 짙게 남고 보고나면 마음 어딘가를 무겁게 만드는 찝찝한 영화가 취향이다. 그러면서 뉴스는 최대한 멀리 피하고 있다.




L과 연애한지 3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의 이야기 소비 취향이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그 유명한 기생충을 보러 가자는 나의 끈질긴 권유에도 그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홀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가는 길에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하며 L에게 '영화를 보지 않길 잘한 것 같다'고 카톡을 보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후에도 L은 기생충을 보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 10월 3일 TV에서 추석특선영화로 기생충을 방영한다는 광고가 계속 보였지만, 역시 L은 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영상을 더 재밌게 보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나의 경우엔 드라마나 영화를 본 후 함께 본 상대와 이것저것 떠드는 걸 가장 좋아한다. 저 인물이 과거의 누군가 혹은 나의 어떤 때를 떠올리게 한다든지, 이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닌지, 어떤 장면에서 울컥했고 어떤 장면은 별로였는지 공유하는 기쁨이란. 반면 L은 만족스럽게 영화를 본 후에도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하지 않는다. 내가 어땠어? 라고 물으면 늘 '좋았어.'라고 말한다. 내가 끈질기게 왜 좋아하는지 조목조목 물어보면 그는 대답을 힘들어했다. 대부분의 경우 L은 음악이 좋았다든가 맘에 들었다라는 답을 하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L에게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일방적으로 떠드는 시간을 줄이고 글을 쓰거나 사람들의 리뷰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혹은 가끔 만나는 친구와 묵혀둔 대화를 하기도 했다.




L과 내가 본방사수를 하며 함께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는 프로그램은 세 가지이다. tvn 놀라운 토요일, mbc 구해줘 홈즈, kbs 1박2일.  이 세 프로의 공통점은 아무 생각 없이 봐도 무해한 예능 프로그램이며 심각한 상황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승자와 패자와 대결이 있는 척하는데 사실 져도 이겨도 그다지 손해보는 일도 그다지 멋진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출연진들은 아주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프로그램 속 하찮은 대결에 목숨건 듯 임하는 게 매력적이다.




과거 식당에서 뭐라 꼬집어 말하지 못하겠지만 상당히 차가운 말투를 구사하는 L에게 놀랐던 적이 있다. 불친절한 것도 아니었고 예의가 없는 말투도 아니었지만 흡사 살아있는 인간에게보다는 AI 로봇에게나 건넬 것 같은 냉정하고 거리감 있는 말투였다. 너무 놀라 이를 말해보니 L은 이전에도 그런 비슷한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데 자신은 무척 친절하게 말했으며 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어쩌면 L은 타인의 세계를 좀처럼 자신의 곁에 내주지 않는 사람이기에 이야기에 지나치게 몰입되는 걸 경계하는 걸지도 모른다. 현실 세계를 압도할 몰입감 넘치고 심각한 이야기란 질색인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의 세계의 일이고 자신의 일은 될 수 없으니까. 반면 나처럼 기회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타인과 가상의 세계관과 고민 거리를 끌고 들어와 내재화하려는 인간도 있기 마련이다. 외부와 자신을 좀처럼 구분하지 못하고 어디서나 나를 찾아내며 기쁨을 느끼곤 하니까. 



L은 TV를 잘 보지 않고, 나는 TV에서 재밌는 걸 하지 않아 불만이다. 



-2020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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