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 Dec 05. 2020

색깔과 사랑

실력과 재능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고 있다. ‘JTBC 싱어게인’‘Mnet 쇼미더머니9’, 그것을 보며 음악과 글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조금 베어내 세상의 규칙을 빌려와 아름다운 실체로 전환하는 행위이자 작업, 메시지를 담거나 메시지를 숨긴 채 불특정 수취인에게 돌려받지 못할 편지를 부치며 마음을 졸이고 그럼에도 답장을 기다리는 유일한 선택지. 그런데도 멈출 수 없이 쓰고 또 쓰고 또 써야 숨이라도 쉬어지는 안도감. 그래서 간절하게 또는 즐겁게 노래하고 랩 하는 그들을 보면서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실마리를 얻고 있다.




과거에는 무작정 아름다운 결과물에 끌렸다. 미에는 주관적 취향이 반영된다. 그 취향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 본능적인 감각의 지각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미적 취향을 만족시키는 예술품 앞에서 언제나 무릎을 꿇고 떠나질 못했다. 또한 냉담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리는 척했지만,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찬미하는 예술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끌렸다. 그것들이 아름답지 않거나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할 때 그들을 시기하면서도 은밀하게 기뻤고, 어느 날은 마이너에 가까운 내 취향이 평생 나를 가둬 둘까 두렵기도 했다. 주관적인 아름다움의 다양성을 확장해 나가는 동시에 예술에도 정답이 있는 것 같던 기분을 지워낼 수 없었다.





최근에는 비교적 명확히 내가 끌리는 예술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 그 자신의 영혼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의 결과물에 나는 매료된다. 나의 세계를 잠시 잊은 채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그것에 다가가게 한다. 단순히 모방하지 않는 것 이상의 고유성 확보, 그게 누군가의 색깔이 된다. 타인의 작업물을 흉내내지 않는 것만으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색깔의 정체는 자기 확신이다. 자기 확신은 재능의 영역도 인정의 영역도 성취의 영역도 아니다. 그건 에고를 내려놓는 동시에 에고를 완전히 수용하고 자신을 무조건 용인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삶과 예술품이 일치되는 기적이다. 자신의 좋고 싫음을 내려두고, 부정적 이물감을 기꺼이 삼키고 삶에 저항하지 않는 결정으로 완성된다. 




예술을 사명으로 삼고도 처절한 태도를 지니지 않은 평온하고 고요한 자에게 찾아온다. 자신을 아는 자만이 자신을 닮은 것들을 담담하게 창조한다. 누군가의 찬사에도 누군가의 비난에도 전혀 다를 바 없이 원형을 고스란히 빚어낸다. 그들은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고 평화롭다. 그저 쓰고 그저 만들고 그저 그리고 그저 노래 부른다. 외치지도 어필하지도 증명하지도 않은 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신을 담아낸 사람들의 음악과 글을 보면 감동스러워서 꽤 자주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취향은 역시 개개인의 고유한 주파수에 가까워서 그걸 억지로 조절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설사 진짜 삶의 본질과 정수를 담아낸 아름다운 장인의 작품이라도 단지 나의 주파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아주 편협한 이유로 나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감탄하고 인정하며 훌륭하다고 말하면서도 진심으로 그것과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반면 완성되지 않은 어설프고 빈틈이 많고 결점이 곳곳에 있는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건 재능과는 상관없이 주파수로 결정되고, 주파수란 이미 정해져 있다. 무언가를 고치거나 개선하는 방식으로는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단번에 감각과 직관으로 그걸 접하는 즉시 알 수 있다. 자신의 주파수를 진동시키는 예술을 그리고 지체 없이 영원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은 흔하지 않다. 세상을 살면서 사랑할 수 있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는 그리 많지 않다. 좋게 느껴지는, 분명히 훌륭하고 존경심을 보낼 위대한 예술과 예술가는 많지만, 그 이유만으로 마음을 뺏을 방도는 없다.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주파수가 결정할 일이고 진동의 문제이지 조정의 문제도 열의의 문제도 능숙함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을 하고 싶다면 사랑에 대한 부분은 완전히 잊어야 한다.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억지로 주파수를 조정할 수는 없다. 흉내내기로 그럴듯해 보이는 무언가를 창조할 순 있어도 그런 짜깁기 같은 존재가 담기지 않은 작품은 이른 시일 내 들통나기 마련이다. 사랑은커녕 아름답다는 수준에도 도달할 수 없다. 최우선 과제는 자신이 되어 진짜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용인하고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거나 요구하길 거부하며 두려움도 저항도 없이 몰입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전적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그렇게 만든 작품만이 누군가의 주파수를 울리고 사랑받을 수 있다. 두려워할 것은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길 방해하는 스스로의 불안뿐이다.  




결국 최후에도 누군가에게 살아남을 예술이란 자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예술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형 핸드폰 곁에 핫팩을 넣다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