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과 별개로 당신의 책은 원석이라고.
며칠 전 기대하지 않던 메일 하나를 받았습니다.
대형 출판사는 아니었습니다만,내실 있고 여러모로 재능이 많은 예술가이자 작가님이 창업하신 다재다능하고 생명이 막 태동한 1인 출판사였습니다. 제 책을 ISBN을 발급하고 재출간한 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홍보하고 싶다는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이죠.
저는 무척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보통 1인 출판사는 자신의 책을 펴내고 홍보하기에도 빠듯해서 오히려 기성 출판사보다도 타인의 원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표님은 투고 메일을 많이 받고 있지만, 제 책만큼 함께 하고 싶은 작품은 없다고 확신을 담아 말씀하셨습니다.
생면부지의 타인이 제 책이 잘 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저 독자로서의 응원이 아닌 생업의 파트너로 받아들일 각오로 말이죠. 제게 개인적으로 호감이 있어서도 아니고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분이 제 이야기를 읽어주었다는 사실 하나 밖에요.
책을 출간한 지 1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났습니다.
물론, 엉성한 독립출판물입니다. 언뜻 보면 책인지 엽서인지도 분간되지 않는 스머프같이 파란 표지에 애매한 사이즈, 부연 설명도 딱히 없고 가격도 없는 PR 없이 조용하게 숨어있는 책, Mi Cubano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무의식적으로 책을 만들 때부터 이 이야기를 읽고 싶으면 우연에 기대야 할 것이다. 운명의 시험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건 발견되는 책이지 다가가는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건 알려지면 곤란한 이야기이고, 누구에게나 이해받지 못할 테니까. 이런 정신을 담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이 괴로웠습니다. 꺼내기 곤란했던 용기를 다른 사람의 용기를 빌려 떠밀려서 책을 즐겁게 만들어 놓고는, 특별한 사람만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 놓고는, 다 만들고 나서 전 얼굴을 싹 바꿔야 했습니다. 마치 이 책을 많이 팔고 싶은 사람인 척 해야 했습니다. 이 책의 홍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책을 많이 사주지 않아 스트레스 받는 줄 알았습니다. 돈 벌 마음도 없고 이걸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음에도 초조하고 괴로웠습니다. 그게 이상했습니다. 기대가 없는데 왜 나는 괴로워하는 거지? 나는 위선자인가 찌질이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책을 만든 이상 홍보를 해야겠다는 의무감과 달리 정작 마음 한구석에서는 조용히 이 책이 묻히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보려다가도 죄를 진 것처럼 불편한 증거를 재빨리 찾아내 포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홍보를 잘 못하느니 책을 잘못 만들어서라느니 합리화를 했습니다. 아니요, 더 이상 이 책이 알려지기 않길 바랐습니다. 웃기죠? 말 같지도 않죠? 그런데 진심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격하게 진심입니다.
팔리든 말든 알게 뭐야. 더 이상 난 신경 쓰지 않아. 그렇게 딱 포기해버리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마음이 너무 편안했습니다. 삶에서 제쳐두니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신호처럼 저 메일을 받아버린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출간과 별개로 당신의 책은 원석이라고.
내가 버린 책을 내가 숨기는 책을 원석이라 말해주다니. 과거의 나를 미워할 때 내 곁에 와서 너는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날 살려준 사랑들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이 책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언젠가 온 마음 다해 거리낌도 거부감 없이 전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겠구나 하고 말이죠.
이 책은 골칫거리입니다.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 나눌 수 없는 이야기인데 내 인생을 다 차지해버린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나를 운명론자로 탈바꿈시키고 진정 나를 찾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어준 사건입니다. 여행의 마법 같은 순간이 담겨있고 감정의 응축이 엄청나서 써 내려가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아린 책입니다.
사건이 있고 나서 4년이 지나서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꼭꼭 숨겨두다가 영혼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살기 위해 썼습니다. 이미 마무리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다 정리가 되어서 더 이상 변주될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매년 기억이 흐려질수록 이야기는 더 선명해지고 특별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와의 사랑은 죽는 날까지 변주되고 진화될 거란 걸 깨달았습니다.
전 알레를 만나기 전까지 평범한 연애를 하면서 자아의 신화를 찾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고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알레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신처럼 사랑하는 법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잘나서도 무얼 해주어서도 아니라 존재를 사랑하는 법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지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게 쉬웠냐고요? 자연스러웠냐고요?
아니오, 미칠 만큼 괴로웠습니다.
저는 온몸으로 그 사랑을 거부하고 그를 생채기 냈습니다. 대가로 제 전부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여행을 포기하고 제 전 재산을 바쳐야 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도 의연한 척해야 했습니다. 가족의 신뢰도 잃고 사회적으로 낙오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알레가 요구한 거냐고요?
아뇨, 그는 요구한 적 없었습니다.
그건 제가 되기 위한 혹독한 시험이었습니다. 과거의 관성적이고 잠자고 있는 저를 깨우고 진짜 제가 되기 위한 관문이었습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뭘 지불한지도 모른 채 저는 사랑에 기대 운명처럼 미친 짓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사랑이 아니었으면 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전 겁쟁이거든요. 그런데 그전에 사랑이 저를 살려서 저는 사랑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모든 게 다 맞아떨어집니다. 거기서 조금만 어긋났어도 저는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사랑에 빠졌고, 그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그가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쿠바를 떠나 불법으로 함께 국경을 넘는 일이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저는 강하지 않았고 자주 무너졌습니다. 그 엄청난 과업을 끝나고도 뿌듯하긴커녕 허탈하고 우울했습니다. 그와 6개월을 함께했고 돌아와서 6개월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친구 집에 숨어서 커튼치고 라면 먹고 왕자의 게임을 보면서 살고 있다는 감각을 죽였습니다. 일상이 다 무너졌는데 눈물도 안 나와서 매일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학대해야 했습니다.
그땐 의심만이 가득했어요.
그가 날 사랑한 걸까? 날 이용한 걸까? 남들은 세계여행 다녀와서 그걸로 글도 쓰고 강연도 하고 좋은 기회도 얻는데 아니 하다못해 기분이라도 좋아져 살아갈 힘이라도 얻던데, 나는 왜 다 망가져서 돌아왔지. 알레만 만나지 않았어도, 쿠바를 가지 않았어도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결론은 자기 비하와 자기학대로 이어졌습니다. 네가 능력이 없어서 그래, 네가 멍청이라 그래, 네가 그렇지 뭐.
그래서 3년 동안은 알레를 보내지도 못한 채 생각하면 눈물만 흘렀어요. 누구한테 들킬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말이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 일이 없었으면 저는 절대 지금과 같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지금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나 일상을 살아가는 힘 그런 게 아니라요, 전 절대로 그 일이 없었으면 저를 버리는 게 뭔지도 몰랐을 거고요, 그러면서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는 절대로 영원히 행복해지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제가 누구인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고 항상 괴로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우울을 겪으며 살았을 겁니다.
이유도 명확히 모르면서 알레에게 고마웠어요. 정확히 설명도 못하면서 알레를 영원히 사랑하게 될 거란 걸 알았어요. 그런데 자꾸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오고 잠이 안 오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요즘의 저는 확실히 알았어요. 그건 제 자아의 신화를 이룩하기 위한 관문이었다는 것을요, 제겐 다신 없을 기회였고, 제가 그 기회를 잡은 아주 운좋은 사람이란 것을요. 감사함에 눈물이 납니다.
저는 이 책의 셀링 포인트를 잡기가 너무 괴로웠어요. 입고 메일을 보내고 홍보 콘텐츠를 만들 때마다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망할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여행기도 아니고 이 애매한 이야기를 대체 누가 읽지? 근데 이제는 알겠어요.
이건 저의 연금술사에요. 제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첫 여정을 담은 이야기예요. 친구의 말이 맞았어요. 저는 양이 아니라 산티아고였어요.제 자아의 신화는 사랑이에요. 아마 이해 못 하실 수도 있어요. 사랑타령 지겹잖아요.뭔 놈의 사랑타령. 저도 예전엔 그저 연애나 잘하고 좋은 사람 만나고 그게 사랑인 줄 알았어요.
그것도 사랑이죠,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그게 절 살렸으니까요.
전 제 자신을 바로 보면 제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러면 비로소 날 받아들이는 타인을 세계를 그리고 세상을 그래서 진짜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책으로도 알 수 없고 머리로 이해해서 아는 게 아니라 진짜 제가 되어 알게 되었어요. 이 느낌 너무 분명한데 설명할 수 없어요.
제 글이 다 사랑이고요, 제가 대화를 나누고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도 사랑 때문이에요. 저는 사랑 지상주의자가 맞았어요. 제가 사는 데 필요한 건 오로지 사랑뿐이에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거고요. 이제 모든 게 명확하고 불안하지 않아요. 매일매일 충만하고 파티같이 신기하고 좋은 일들이 펼쳐지고 있고요. 전 난생 처음으로 내년을 기대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동시에 오늘 죽게 돼도 여한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 이야기를 전해야 해요.
99% 사람이 무시해도 저처럼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또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알 수 있는 1%의 당신을 찾기 위해 저는 또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신호를 보내야 해요. 왜냐하면 전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우리가 사랑해야 더 많은 사람이 사랑할테니까요. 이제서야 전적으로 저를 사랑하고 이 책을 사랑하고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었으니까요.
무언가 있는 것 같다고 직관이 들면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당신에게 필요한 것 같다 마음이 끌린다 생각하면 속는 셈 치고 해보자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니,
이 책이 꼭 필요한 10분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그러나 속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전 가짜를 구분할 수 있어요.
제 이야기가 닿아야 하는 분께만 드릴 겁니다.
(선물 신청은 마감되었어요, 신호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D!)
저를 알아주세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사랑을 담아, 고물 드림
Special thanks to 제 책을 발견해준 고마운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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