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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15. 2021

나의 시간

나의 시간과 나의 이야기는 참조 없이 새로 쓸 수 있다는 것

0’s


반 절의 기억이 끊긴 시기, 살아가면서 절대적으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전 생애 중 헛된 욕망이 최소화된 시기로 효율적이고 핵심적인 욕망만을 대체로 갈구한다. 그러나 욕망의 해소가 불충분한 경우 어떤 시기보다도 강력하고도 고정적인 상흔과 뒤틀림이 뿌리 깊이 심어주는 아찔한 시기. 원거리 풍경은 간결하고 평화롭고 목가적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지옥 같은 투쟁을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버텨내야 하는 처절한 삶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패배는 말 그대로 죽음, 생명의 단절을 의미한다. 의식이 관여하지 않은 시간의 덕인지 인생의 본질과도 가장 닮았다. 사람은 상당 부분 운에 좌지우지되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잊는다. 주변 사람의 변덕스러운 호의와 그래도 될 만하게 굴러가는 환경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이 시기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은 부모의 주거지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자연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실컷 놀고 되돌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내일도 그다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기대로 잠들 수 있다는 일상의 한 인물로 거주할 수 있다는 행운이다. 생존, 온전한 생존의 목표, 운이 좋다면 세상이 유일하게 사람에게 몰아붙이지 않는 시기이다.




10’s


세상과의 단절을 배우는 피곤한 시기, 이때부터 세상은 끊임없이 숙제를 내주는데 그 숙제를 다 풀어도 휴식 시간 따윈 오지 않고 두 배의 숙제를 계속 내준다. 문제는 모르고 당한다는 거다.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을 해주기는커녕 일시적인 상태라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이 시기에는 거짓말에 잘 속는데 아직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일삼기 때문이다. 인생 처음으로 세상은 나 같은 머저리로 가득 차 있는 걸 깨닫는다. 그 머저리들 사이에서 머저리인 게 들통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이 시기를 지배한다. 세상은 갑자기 복잡한 공식과 과거 이야기를 들이밀며 삶을 헤집어 놓는데 상당 부분 무력감을 느끼며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어제까지는 완전하다고 하던 세상이 단시간에 태세를 180도 전환하여 끊임없이 부족하다는 협박을 하며 빡빡한 사회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배울 수 없다. 쓸데없는 걸 진지하게 배우도록 몰아붙이는데 사회는 최적화되어 있다. 건강한 신체가 없었다면 기다리고 인내하는 게 불가능했을 시기이다. 이때 세상이 회유하는 달콤한 유혹은 이 모든 게 곧 끝나고 어른이 되면 자유가 주어진다는 개살구같은 망언인데 언제나 모든 이에게 효과가 좋다.





20’s


방탕, 허무와 상실이자 더한 혼동의 시기, 세상은 청춘이라며 이 시기에 찬가를 보내는 데 그 노랫말이 어쩐지 가슴이 훅 후벼 파고 내내 좌불안석을 경험한다. 혼란을 느껴 정작 중요한 건 아무것도 못 하는 시기, 얼마 전까지 생각할 틈 없이 압축하며 규격 검사를 하던 세상은 갑자기 다른 삶을 살았던 미지의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 정중히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서 삶에 관한 질문을 던져버려 당혹감으로 얼룩지게 한다. 두 번째 뒤통수, 손발을 묶어 아무것도 못 하게 가둬 놓고 이제 해방해주고 나서는 이제껏 당신이 벌인 온갖 영웅적인 과거 행적을 나열하라며 미소를 짓는다. 존재하지 않던 나의 자각, 나의 존재와 운명, 의미를 확립해야 한다는 걸 2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으며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을 모자란 사람 취급하기에 티를 낼 수도 없다. 개인에게는 세상이 산산이 조각날 만큼의 혁명이자 지각변동의 첫경험이다. 자칫 여기에 삶을 소비해버리면 세상에 밀려나 당신 존재의 입지가 영원히 지워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지각변동을 무시해버리면 당신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 이때부터 세상은 당신에게 손을 완전히 떼 버린다. 당신이 웃을 때만 따라 웃고 당신이 울 땐 무심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입지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말살될 때 사람은 겸손을 배우거나 영원히 자신의 틀에 갇혀 다시는 해방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때부터 당신의 모든 행동은 냉정하게 평가되어 기록되고 그 기록은 당신의 존재를 대체하게 된다. 그 기록이 세상에 꼭 필요하다면 당신은 어른으로서 대우받게 되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세상은 당신을 헹가래하며 안심시킨 후 모든 걸 빼앗아버릴 것이다. 이 시기의 행운은 지각 변동 따위 무시될 만큼 세상과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살아가는 운명을 갖거나 0’s의 시기처럼 젊음과 청춘을 마음껏 낭비하며 아무 걱정 없이 흘러가는 타고난 낙천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에게 주어진다.




30’s


멈춤, 전환의 시기. 문득 세상에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했던 신체는 어느새 점차 노화되거나 자주 삐걱거리게 되는데 더 약속 없는 기다림이나 지루한 거짓말을 믿기에는 몸도 정신도 아프다는 걸 깨닫게 된다. 10년의 방황 덕에 조금은 자신과 삶에 대한 프레임을 갖추는 시기, 현명하다면 혹은 여유가 된다면 더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과 노력을 마구 쓰고 싶지 않아지는 구두쇠가 된다. 이 시기부터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어 걷게 된다. 하나는 지루한 일상의 승리를 견디며 적당히 사회화된 일원으로서 역할도 타협하며 삶이 그리 괴롭지 않다는 위안과 안정을 마음속에 품고 이내 그것까지 일체화되어 살아가는 현명하고 고귀한 삶이다. 다른 하나는 모험을 떠나는 바보의 삶이다. 충동과 불안정함으로 얼룩진 이전과 달리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며 별다른 기대도 없이 담담하다. 어느 삶을 살 게 되더라도 기꺼이 머저리가 되겠다는 각오를 하면 삶을 살기가 조금 편안해진다. 삶에 지쳐 감정을 표현하는데 무뎌지거나 눈물이 메마르거나 모든 열기가 바삭해질 수도 있는 시기인데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아름다움이나 무가치하고 무쓸모한 존재들에 더 마음이 열리는 시기가 될 수도 있다.





30’s의 절망은 탁월하고 존재가 기억될 한 특별한 사람들은 그 시기 전까지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편협한 확증에 있었다. 세상의 존재만큼 우주가 존재하고 우주만큼 다양한 시간과 이야기가 있다는 걸 듣고는 있었지만 내 목소리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동경하는 우주의 시간들은 떡잎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30’까지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이 삶은 실패였다. 참조할 것도 건져낼 게 없었다. 임의대로 세상의 한쪽 이야기에 매몰되어 20’s이 가장 빛나는 시기라고 믿었다. 삶으로 증명된 게 없는 말은 믿지 않는다. 말은 너무 쉽다. 생각과 상상과 관념과 단어와 문장은 너무나 수월하고 매끄럽다. 말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단 한 단어를 삶으로 끌어내기 위한 과정과 노력은 얼마나 치열하고 지지부진하고 희귀한 일인지. 말은 믿지 않는다. 삶을 듣는다. 숙제 검사는 끝났다. 숙제의 삶도 끝낸다. 40’s는 무엇으로 쓰게 될까? 지금 알게 된 건 나의 시간과 나의 이야기는 참조 없이 새로 쓸 수 있다는 것, 원형도 기원도 필요치 않다는 것, 아마도 운이 좋다면 세상의 한 이야기로 편입하게 될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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