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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24. 2021

자동 항법 모드

사람은 누구나 자동 항법 모드가 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자동 항법 모드가 있잖아요. 길을 따라 가는 거죠. 우회전도 좌회전도 고려하지 않고 열을 따라 가는 거죠. 막히면 막히는대로 차례도 기다리고, 누군가는 갑자기 끼어든 차량에 화를 낼 수도 있겠죠. 크락션을 울리거나 욕도 좀 하고요. 그러다가 뻥 뚫린 도로가 나올 때가 있잖아요. 물론 흔치 않죠. 그럴 때야 대체 어디로 가고 있었지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자동 항법 모드는 저전력 모드라서 에너지를 아낄 수 있죠.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고 어디로 갈지 얼마나 속도를 달릴지를 결정해야한다면 금방 방전될 거예요.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게 아주 유용하고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인생에는 네비게이션이 없잖아요. 길을 잃어도 길을 잃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아요.



-운전은 익숙해져도 삶은 익숙해지지 않다는 말이죠? 길을 잃는 데 익숙해지긴 해요. 더 이상 패닉을 일으키지 않죠.



-자동 항법 모드가 작동하니까요. 너무 자주 너무 많이요. 대부분의 경우 살던 대로 살게 되요. 그것도 일관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나태에요, 지겨움이고요.



-글쎄요. 조금 더 오래 달릴 수야 있겠죠. 달리는 게 목적이라면 그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에요. 달리는 게 즐겁다면 말이죠.



-거기엔 취향이 반영 되어야 해요. 이대로도 좋다는 그저 달리고 싶다는 즐거움 말이죠. 말하자면 선택이죠. 자동 항법 모드를 선택하는 거네요.



-수동적인 행동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셈이네요.



-그럼 그것도 자동 항법 모드일까요? 어쩌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인생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몰라요. 자동 항법 모드가 가장 저항이 덜 하니까요.



-그게 안 돼서 괴로운 거겠죠?



-그렇죠. 반대로 자동 항법 모드에서도 ‘내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거지?’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리면 그건 자동 항법 모드가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같아도 말이죠? 한 가지 확실한 건 더 괴롭긴 할테죠.


-에너지는 있는 대로 쓰면서 결국 남들과 똑같이 달리는 중이죠.


-그래도 그런 모드라면 언제든 자동 항법 모드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회의론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봐요.


-희망이네요, 희망. 제게 필요한 게 그 말일지 몰라요. 아무 것도 변화는 게 없어도 변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요. 저는 자주 절망해요. 어느새 돌아서면 가기로 한 길은 잊고 갈 곳을 잃고 정처없이 헤매며 자동 항법 모드로 흘러다니며 살거든요. 어떤 날엔 그걸 깨달아도 영원히 자동 항법 모드로 살게 될까 두려워요.



-한 가지는 확실해요. 두려움이 있는 한 당신이 영원히 자동 항법 모드로 살 수 없단 거 말이죠.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요. 길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어디든 이어져 있죠.



-당신은 길 잃는 걸 좋아했었죠.



-맞아요. 당신과 비교하면 전 비교적 자동 항법 모드에서 자유를 얻기도 하죠. 꽤 요긴하게 쓰고 있고요. 그래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아요.



-원하면 언제든지 핸들을 돌리고 샛길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죠? 적어도 당신은 그런 안정감이 들어요.



-맞아요. 제가 운전을 꽤 잘하는 편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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