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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pr 29. 2021

나 봄 좋아하네

유난히 긴 봄이다. 


작년 봄은 유독 어둡고 힘이 없었다. 별일이 없었는지 아님 살아있다고 외칠 이유가 없었는지 유독 글을 쓰지 않았다. 숫자 4를 좋아하는 청개구리는 어릴 적부터 봄이 싫었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푸른 잎이 반짝거리고 벚꽃이 흩날리고, 그 자리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모든 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증명하듯이 또 피어나는 생명력. 청춘이 부끄럽고 에너지 없던 내게 봄은 너무 대책 없이 밝았다.


겨우내 다시 태어난 듯 신나고 활기찼던 기분은 이상하리만큼 봄이 되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만족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봄은 언제나 잔인하다. 눈치 없이 혼자 밝게 빛나는 봄을 보며 적막하고 막막한 장래는 한층 어두워진다.


그러나 가끔 밖으로 나가 아무것도 없던 칙칙했던 길가에 이름 모를 들꽃이 피고 연둣빛 풀과 나무가 빼곡히 선물처럼 피어난 광경을 보며, 내게 다정히 인사하듯 생명의 빛을 발산하는 자연을 바라볼 때 문득 깨달았다. ‘아! 나 봄 좋아하네. 봄이 취향이네.’ 봄이 영원한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버렸다. 이제 청명한 하늘과 따사로운 햇볕과 봄 내음은 아무리 침잠하고 어둡고 칙칙한 나라도 속절없이 무장해제 되고마는 절대적 존재로 탈바꿈했다. 발그레한 소녀처럼 ‘좋아해. 좋아해.’ 마구 고백하고 싶을 만큼 충만하고 아름다운 행복의 버튼이 되고야 말았다. 언제 어디서라도 무조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형편없어 보일 때, 힘이 없고 어두운 기운이 전파되면 어쩌지 걱정이 들 때,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보지 않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과 숙제와 처리해야 할 일상의 자잘한 부유물이란 건 항시 존재하니 덜어주지 못할망정 양심 없이 하나 더 얹어서는 안 되지. 게다가 괜찮은 척 연기도 어색해 기분이 투명하게 비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누군가를 만나기 전 확실한 점검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자다깬 듯 헝클어진 마음에 꼴이 아무리 엉망이라고 해도 그저 만나는 것 만으로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이 있다. 어둡고 회의적이고 답이 없는 고민을 이야기해도 나도 모르게 하하 호호 유쾌하게 웃게 만드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 상황도 변한 게 없고 뭐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도 괜히 홀가분하고 씩씩해진 기분이 든다. 혼자서는 아무리 비워내고 게워내도 답도 없던 탁한 마음에 그들은 무엇을 주고 간 것일까?


이번 봄이 긴 건 그들 덕분이다. 봄이 잔인하고 내가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감각을 되살려주는 고마운 사람들. 이 봄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시간인지 새삼스럽게 세어보게 만드는 말들과 표정.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생이 신나는지 또 무언가를 꿈꿀 수 있는지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사람들, 자아는 결코 혼자 채울 수 없다. 귀한 인연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사랑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야 확신할 수 있다. 지금은 봄이다. 그리고 나는 봄을 제일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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