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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y 02. 2021

‘하고 싶다’가 꺼려지는 요즘

하고 싶다는 정말 하고 싶다는 말일까?

‘하고 싶다’고 무심결에 생각하다가도 의식적으로 정말로 하고 싶은 지 한 번 더 묻게 되는 요즘이다. 예전에는 ‘해야 한다.’란 말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큰 구분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 구분이었고 해야 할 일들을 시간 맞춰 처리하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상대적으로 ‘하고 싶다.’라는 말은 무게가 가볍고 말랑한 기분 좋은 말이었다. ‘한다’ 혹은 ‘할 것이다.’와 확연히 구분되는 푸념에 가까운 말이거나 취향을 나타내는 말로써 기능했다. 해보지 않았지만, 왠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것들 혹은 실현 가능성이 다분히 낮아 아쉬운 일을 추리며 주로 ‘하고 싶다’란 표현을 사용했다.



‘발리에 가서 한 달 살기 해보고 싶다.’
‘언젠간 카페 하나 차리고 싶다.’
‘수영 배우고 싶다.’
‘언젠가 책 내보고 싶다.’
‘바닷가에서 살아보고 싶다.’



‘할 거야’, ‘약속할게’라는 문장은 책임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닫히고 명확한 표현이다. 여건이 어렵더라도 그 말을 뱉는 순간 신뢰를 잃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해야만 했다. 반면 ‘하고 싶다’에는 결연한 의지도 없고, 현실화의 제약도 없었다. 그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좋을 문제였다. 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체념에 가까운 말.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다’라고 표현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받을 위험도 없었다. 책임 없이 마구 내뱉으며 기분 전환 할 수 있는 표현 그게 바로 ‘하고 싶다'라는 말에 담긴 속사정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자유도가 훨씬 높아진 요즘, ‘해야 한다’는 표현이 빠진 자리를 대체하는 건 ‘하고 싶다.’이다.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거나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는 시간이 가득한 상황에서 어쩐지 함부로 ‘하고 싶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아무리 혼잣말일지라도 가볍게 내뱉기가 꺼려진다. 이젠 안다. '하고 싶다'고 말하고도 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아니라는 뜻이고 그건 위선 혹은 거짓말이나 다름없으니까.



이전까지 내 생은 수동적이었고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 ‘하고 싶다’라는 소극적 객체의 한낱 실낱같은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달리 세상에는 ‘하고 싶다’라는 말을 ‘할 것이다’와 거의 유사한 표현으로 쓰고 행하는 주체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하고 싶다’란 표현의 모순이 없는 그들을 보며 나의 ‘하고 싶다’는 의문을 지니게 되었다. 그건 정말 '하고 싶다'가 맞았을까? 누군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혹은 어떤 일이 저절로 운 좋게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는 방관자의 시선이 고스란히 반영된 말에 불과했다.



‘하고 싶다’라는 말은 그렇게 촐싹거리며 쓰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내 생애에 반영하고 머지않아 실체화하고, 얻고 싶은 것들에 관해 신중하고 결연한 의지를 담아 ‘하고 싶다’고 주문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하고 싶다’는 미래의 ‘할 것이다’를 고르고 준비하는 단계이며 선언이다. 점을 선으로 잇는 연결고리기도 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진심으로 원하고 할 일들에 관해서만, 정말로 하고 싶은 일에 관해서만, 자신 있게 ‘하고 싶다’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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