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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ug 23. 2021

나는 돌 씹어 먹는 아이야.

혀는 권력이다.

혀는 권력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말을 할 권리를 갖는다. 허용의 범위를 정한다. 그가 권력을 넘겨주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권력이 없는 자는 강제로 경청하게 된다. 경청이 필요한 사람은 힘 있는 자이다. 약자는 강한 말도 분노도 쏟아낼 권리가 있다. 약자는 구태여 경청할 필요 없다. 그러나 경청하라고 늘 강요하는 주체는 언제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다. 솔직해지자. 당신이 바라는 건 순종과 복종이지, 경청이 아니다.




부모님은 모두 아이들을 사랑한다. 부모님이 내게 해준 건 일반적인 관계에서 요구도 기대도 할 수 없이 엄청난 것들이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를 위해 많은 걸 희생했다. 시간도 능력도 자신의 색깔도 욕망도 꿈도 미래도 자유도. 나는 그 점을 알고 있다.


흔히 아이들은 부모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이들만큼 부모 말을 절대적으로 잘 듣는 존재도 없다. 아이에겐 부모가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그들은 심각하게 진저리 쳤던 부모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넘어가는 선을 결코 넘지 못한다. 기억조차 못하는 순간부터 부모가 원하는 역할을 완벽히 알아듣고 그 시나리오에 맞춰 살면서도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 여긴다.


나는 돌 씹어 먹는 아이다. 내겐 그다지 치부랄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 취약하고 바보같은 모습을 고백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숨기는 비밀이 많지도 않다. 상대가 받아들여준다면 난 어디까지도 말할 수 있다. 난 더 이상 비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모님에게는 절대로 내 모습을 모두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흙과 못을 씹어 먹는 부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취약점을 고백할 때 자신의 취약점을 함께 고백하거나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일반적이고 안정적인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튀는 건 죄악이었고 나는 너무 유별났다. 오히려 커보니 너무 평범해서 실망스러웠던 내게 '김혜진'이란 이름을 지어 준 아빠는 내가 평범하게 바라던 대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엄마는 자주 내가 별나다고 혀를 찼고, 공무원이 최고이고 조금 더 잘 사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면 만사 편해질 거란 말을 자주 했다.




아빠는 단 한 번도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부정하거나 막은 적이 없다. 아빠는 우리 딸 하고 싶은 거 다하라고 말해주는 내 편이었다. 가끔 아빠의 사랑의 크기나 너무 커서 숨이 벅차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아빠의 이상함과 다름의 허용범위는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목표에 한해서였다. 무엇이든 도전해도 되었지만, 안 되는 건 안되는 거였다. 우울증 약봉지를 보고 매우 당황하던 아빠는 내게 그런 곳에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슬펐다. 내가 이해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빠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딸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데 너무 큰충격을 받은 게 드러나는 표정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우울보다도 오히려 아빠의 상처가 걱정 될 지경이었다. 아빠에게 정신과는 나쁜 곳이거나 이상하고 실패자만 가는 곳이었고, 절대로 사랑하는 내 딸이 드나들 수 없는 금단의 장소였다.


그래도 고백했다. 나는 우울하고 당신들과 다르다고. 나는 더 이상 입 다물고 살 순 없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를 가둬두고 살 수 없다고. 날 살리고 싶으면 날 병원으로 보내줘. 사실 난 힘들어. 힘들다고 말 좀 해야겠어.


엄마는 늘 내가 튀는 행동을 할까봐 걱정했다. 내가 데모라도 할까 우려했다. 정작 내 삶은 일탈 하나 없는 모범생 그자체였는데, 난 나의 욕구를 억누르고 착한 아이 역할을 하다가 내가 착한 아이고 조용한 아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었는데 나도 몰랐던 걸 엄마는 대체 어떻게 알았던 걸까. 이상과 의미라면 목숨을 던질 수도 있는 머저리가 나라는 걸. 엄마는 울면서 말했다. 여전히 너를 이해 못해서 미안해. 난 너를 이해해줄 수 없어.


그때 함께 울며 나는 엄마를 안았다. 괜찮아. 엄마라고 자식을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야. 엄마는 얼마나 힘들어. 이해심 많은 내가 이해할게. 더 성숙한 내가 이해할게. 엄마는 내가 이해 못해도 나는 억울해하지 않고 이해 못하는 우리 가족을 이해할게. 이해를 바라지 않을게. 그렇다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어느날 난 가족에게 이해 받지도 못하고 무조건적인 정신적 지지를 받아본 적도 없어! 라고 홧김에 말하자 엄마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너에게 못해준 게 뭐니. 알아 알아 엄마의 최선을 다했겠지.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도 알고 나는 그 점에 감사하고 운이 좋다는 것도 알아. 다만 내가 가장 원하는 걸 줄 수 없을 뿐이지. 아마 그건 엄마도 받아본 적 없는 걸꺼야. 그리고 내가 딸인 이상 나는 엄마에게 그걸 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돌산에서 할아버지를 만나듯이 나는 가족이 아님에도 내가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어. 돌을 먹는 기쁨을 느꼈어.


가족 안에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고, 사회로 나와서는 너무 내 생각을 말해서 곤란했어. 내겐 권력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나는 권력자들에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느꼈거든. 그들은 내 말을 들어준 적 없었어. 되바라졌다고 어린 놈이 이것 보라고 말 뽄새가 뭐냐고 말했지. 맞는 말을 하면 그들은 더 화를 냈어. 내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말하는 내가 문제였지. 우리는 고용과 계약의 관계일 뿐인데 왜 내 인격을 내놓으라는지 난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못하겠다고 반항했어. 그랬더니 나는 상식도 예의도 없는 사람이 되더라. 입 다물고 경청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들이 바란 건 순종과 복종이었어.



그렇지만 나는 외쳤어. 나는 돌 먹는 아이야. 나는 돌을 먹고 살아. 나는 돌 씹어 먹는 아이라고. 그건 무슨 엄청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태어났을 뿐이지. 나는 돌이 맛있어. 맛있다고. 나는 돌 씹어 먹는 아이야. 이건 반항이 아니라 외침일 뿐이라고.


대신 나는 돌 먹는 사람들을 모으고 또 돌 먹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을 위한 나만의 돌산을 만들었지. 이 돌산에 돌 먹는 아이들이 찾아오길 바래. 그럼 난 맛있는 돌을 나눌래. 아무 판단 없이 돌을 함께 먹고 춤을 추고 노래 할래. 가끔은 돌 먹는 걸 손가락질 하는 사람에게 너무 화가 나지만, 이젠 알아. 그들이 이해하길 바라지 말고 내가 이해해야지.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말 뿐이 아니라 영역을 한계 짓지 말고 정말로 뭐든 그럴 수가 있다는 거.



서로의 도시락을 싸고 서로의 산을 가끔 놀러가고 그러면 되는 거라는 걸. 이제 나도 더 이상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입을 막지 말고 경청해야할 시간이 되었다는 걸. 이제 나는 권력이 없어도 충분히 강하니까. 나는 약자가 아니니까.



내가 이상해서 좋아. 내가 부당한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불합리한 것에 대해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라서 좋아. 내가 더 많이 느껴서 좋아. 날 이해 못하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서 좋아. 내가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라서 좋아. 내가 많이 울고 금방 뚝 그치는 사람이라서 좋아.



내가 돌을 씹어 먹는 아이라서 좋아.
우리 부모님이 돌을 씹어먹지 않아서 좋아.
돌산을 만들어서 좋아.
돌산에서 함께 놀 아이들을 만나서 좋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나는 더 많은 아이들이 말대꾸하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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