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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ug 27. 2021

사랑과 미련, 미련과 사랑

어렸을 때부터 '접속'식 엇갈리기 장면을 과하게 싫어했다. 마음이 닿지 않는 건 늘 마음이 아팠다. 이별은 누군가가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때 해야 하는 거라고.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랑하면 함께해야지 왜 헤어지나. 분명 거기엔 사랑하지만... 하고 뒤에 나오는 이유(변명)로 인해 감당이 안 되니 헤어지겠다는 의미에 불과하지. 노력하기 싫어졌어. 이게 언제나 이별의 핵심 이유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데도 흘러간 인연은 놓아줘야 한다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반항심이 가득했다. 싫다. 싫어. 왜? 그런 게 어딨어. 서로 원하면 역경과 고난이 어떻든 타이밍이 어쨌든 외부 환경이 어떻다한들 계속 가는 거다. 그게 사랑이다라고. 마음이 제일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관계는 미묘하고 속도가 다른데 결국 관계의 합은 내 것도 상대의 것도 아닌 그 모든 변수의 합이라 결코 의도대로, 마음대로 될 수 없다는 걸 배우고 나서는 어쩔 때는 포기처럼 보이는 내려놓음이 꼭 체념이나 도망이 아니라 단지 수용일 뿐이라는 걸 아주 어렵게 배웠다. 여전히 마음은 아프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내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굴지만, 관계 앞에서 늘 겸허하다.


살다 보면 이상하게 서로 별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일이 되려고 되려 보나 싶을 만큼 술술 넘어가는 관계도 있고, 반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타이밍이 맞지 않거나 아귀가 맞지 않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힘든 안 맞아 보이는 관계도 마주친다.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거나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방해 만이 가득하다. (노을의 인연 노래 가사처럼) 그럼 우린 안 되는 운명인가? 자문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함께 있는 것조차 힘겨우면 서로 놔주는 게 순리인가.


시작했다가 한쪽의 애정이 식고 한쪽의 애정이 남아있는 경우 문제가 더 복잡하다. 사랑이란 예쁘고 아름다운 사랑이란 단어도 일방적일 때 얼마나 폭력적이고 스트레스가 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이 문제에 간단한 해법을 찾았는데 사랑하고 싶으면 그냥 사랑하면 된다. 바라는 거 없이 상대에게 애정을 돌려받으려고 하는 욕망 없이, 그저 사랑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된다.


다만 사랑의 표현방식이 물리적으로 구체화되어 상대방에게 닿았을 때 상대방의 반응과 나도 모르게 상대의 모습을 왜곡하거나 해석하며 속상해하거나 실망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마음이 문제지.


이상하지. 상대도 나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으면 그건 미련이 아니라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 상대방이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으면 그건 단지 미련일 뿐 사랑은 아닌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게 사랑이겠지. 하지만 이미 멀어진 사이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결국 또 추측이 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건 물리적인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내 마음에는 방이 아주 많고 한 번 누군가를 사랑했던 마음은 모두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그 방 안에 그대로 쌓여있다. 나는 언제든 그 방에 들어가 그 마음을 열어보고 미소 짓는다. 그건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누구도 뺏지 못하고 부정할 수도 없다. 거긴 내 마음의 방이니까.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영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미련의 방으로 보이겠지만, 내겐 분명 사랑이다.


아무 기대가 없어도 볼 수 없어도 그래도 나는 사랑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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