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뒤 숨은 감정 해석
나는 시간여행자다. 1초 전만 해도 차가운 질감의 바람을 느끼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차가 쌩쌩 지나가는 4차선 도로 옆 정류장에 서 있었다. 습관적으로 열어 본 스마트 폰 창으로 평소 글을 길게 쓰지 않은 누군가의 글을 읽는 순간, 심장이 한 층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불안과 야속함을 연료로 삼아 마치 해리포터의 '포트키'를 붙잡은 듯 순식간에 과거로 딸려갔다. 주변 환경은 어느새 뒷전이다. 내 마음에 갇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과거의 덫으로 미끄러지며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원치 않는 이 시간여행을 멈출 수 있을까?
'이 글 속 배려 없는 이 사람, 혹시 나인가?'
글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심장이 점점 빠른 속도로 뛰고 현기증이 났다. 내 안의 목소리는 그와 있었던 일을 모두 헤집어 놓은 뒤 자잘한 증거를 맞추어 내 앞에 들이밀며 해명을 요구했다. 네가 범인이라고. 찬물 세례라도 당한 듯 어깨가 축 처지고 건조했던 눈이 촉촉해져 눈에 잔뜩 힘을 준다.
'얘 또 시작이네.' 보다 못한 이성이라는 녀석이 글 속 단서를 하나하나 분석한다. '너 최근에 그를 만난 적 있어?' '아니.' '그를 단정하거나 반박하는 대화를 나눈 적 있어?', '아니...', '그럼 너 아니네.' 안도감과 홀가분함이 차지할 자리에는 시무룩함이 솟아났다. '그러게... 근데 왜 나라고 생각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찔려하며 나의 모든 행동을 단속하며 힘을 빼고 나면 아무런 잘 못 없는 그가 야속했다. 그가 밉다. '대체 왜? 그는 잘못한 게 없는 걸.' 표면적인 감정을 모아 분석기를 돌려보면 이런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줄까 두렵다.'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두렵다.'
미움은 인정 욕구가 해소되지 못한 반작용일까? 평판이 깎여나갈 것의 두려움인가? 그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선수를 치듯 미워하고 싶은 걸까? 이전에는 거기서 끝냈겠지만, 심해까지 레이더를 세우고 들어가 보기로 한다. 거기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다. 크게 복식 호흡을 하며 배꼽이 등에 붙을 때까지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타인은 그리 오랫동안 미워하지 않는다. 실제 인격 모독에 가까운 발언을 듣는 딱 그 순간과 그 여운이 남아있는 가까운 시간 동안, 상처받거나 아플 뿐이지. 어차피 날 모르고 내가 관심도 없는 누군가의 말은 그리 오래 내 마음에 남지 않는다. 별 감정 없는 아무개를 만나러 시간여행을 가지 않는다.
내가 연락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단단히 현실로 이어진 이어진 친구들과 지인들은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진 않지만) 설사 날 서운하게 하거나 내 말을 오해했다고 해도 아니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미워하지 않는다. 시간 여행을 떠날 필요 없이 그에게 묻거나 사과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면 되니까. 누군가와 갈등을 겪거나 사소한 말다툼조차 잘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내 곁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내 의식 속에서 양가감정은 없고 그들을 미워한다는 인식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사실 그를 좋아한다는 말이야.'
이 미움의 원인은 놀랍게도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생겨난 거다. 아마 그가 누군가의 무심함을 지적하거나 의리가 없다는 뉘앙스의 문장을 쓰면 그게 핵심 내용이 아닐지언정, 이번처럼 꼼짝없이 그를 미워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을 거다. 누군가 변한 것 같다는 글을 읽게 되면 속상해서 소화가 잘 되지 않을 거다. 그 글의 목적어가 설령 내가 아니어도 나는 그를 보며 내 마음을 끊임없이 투영시켜 바라볼 테니.
그와 일상적으로 만나던 그 친밀한 시간을 나는 생각보다 더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에게 연락하고 안부를 묻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자연스럽게 묻는 그날이 그리워 그러지 못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무심하고 정이 없다고 여기고 있다. 내 애정의 크기는 여전히 큰데 그걸 그에게 알려줄 방법은 이제 없으니까. 균형추가 흔들리며 오갈 데 없이 무거워진 애정이란 마음이 나를 짓누른다. 미움의 형태를 띠고. 혹시 그에게 실수한 게 있지 않냐며 네가 그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원흉이 아니냐며. 그는 널 그렇게까지 좋아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도 잊지 않는다.
사정상 자연스럽게 그와 조금 소원해졌을 뿐인데 내 마음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차라리 날 별로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멀어진 게 자연스러워. 관계의 선이 흐려진 게 슬퍼서 차라리 날 미워했으면 한다. 생각해보면 오래오래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하나도 빠짐없이 아직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시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을 나는 미워한다. 애정을 돌려받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애정을 다 주지 못하는 누군가를 나를 미워한다.
관계는 과거가 되어도 미움을 통해 시간여행을 하며 현재로 끊임없이 돌려올 수 있으니까. 그럼 난 그 관계를 붙잡고 사는 거니까. 이건 더 이상 그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 미움과 사랑의 역동성에 관련한 문제이다. 미움과 사랑은 같은 말이다. 사랑의 잔여분이 쌓이면 미움으로 전환된다. 어린 시절부터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질 못할 망정 괴롭히는 그 심리가 이해된 적 없었는데 내 꼴이 딱 그렇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 '사실 넌 그를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지금 그를 미워하는 거야.' 대신 말해주고 미움 뒤에 숨지 않는다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해도 그와 친밀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상상을 한다면, 현실의 그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순간을 생생하게 그리게 되면 이 시간여행을 멈출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이 그저 사랑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투명하고 간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