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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y 27. 2022

오늘 서울은 하루 종일 맑음

오늘의 운세는 95점이다(100점인 줄 알았지만 5점이 부족했다).


늘 화창했지만 오늘은 유독 화창한 데다가 구름 모양도 다채롭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밖에 나와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였다. 신호등은 누가 조절해주는 듯 건널목에 도착하자마자 바뀌었다. 배차 간격이 긴 버스도 바로 전전 정류장에 있었다. 버스는 유독 깔끔하고 깨끗하고 사람이 없어 여유롭다. 귀에 꽂은 아이팟에는 백예린의 산책, 적당한 에어컨 바람. 확실하다. 오늘 나의 운세는 날씨만큼 더없이 훌륭하고 아름답다. 


명상 코스를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을 떠올렸고, 만나고 싶어졌다. 그중에서 꼭 라라 님을 만나고 싶었고, 만나기로 했다. 글이 아니라 말로 전해야 했다. 동시에 조심해야 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주실 라라 님이지만 여기엔 집착이나 조급함 없이 사랑과 여유가 가득해야 했다. 그래서 적당한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고민하다가 이때라고 용기를 내서 만나잔 말을 꺼내니 안 그래도 자기도 연락하고 싶었다는 그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기쁘다. 어떤 날이든 시간을 내주시면 달려갈 심산이었지만, 이왕이면 가장 운이 좋은 날 만나고 싶었다. 그게 오늘이었다.




버스에 탄지 1분 만에 알게 되었다. 버스 운전기사님의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어쩌면 환멸이나 분노를 느끼고 있을 거라고. 기사님은 '에어컨 틀었으니 창문 닫으세요!'라고 신경질적이게 몇 번이고 말했다. 분노에 놀라 잘못한 게 없는데도 화들 짝 놀라 창문을 살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답답했는지 신호등에 멈춰 서자 기사님은 씩씩거리며 열린 창문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금 탄 승객은 아무도 창문을 열지 않았다. 아마 이전에 탄 승객 한 두 명이 창문을 열고 내린 것 같다. 


버스가 총알택시처럼 아주 빨리 달렸다. 맨 앞에 앉지 않아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으나 차선이 이리저리 마구 바뀌었고, 두 정거장을 지나기 전에 크랙션이 세 번이나 울렸다. 기사님은 분명 버거운 하루를 보냈거나 지금 운전을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참고 있는 상태인 게 틀림없다. 화를 내도 좋을 대상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껏 분풀이할 수 있는 대상을. 


만일 다른 일로 분노한 승객이 타는 순간 불이 붙을 것이다.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승객들은 타자마자 재빨리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모두가 긴장되어 운전기사님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방송이 나오기 전에 미리미리 하차벨을 눌렀고, 버스가 멈추기 전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모두들 타자마자 착실하게 안전벨트를 맸다. 기사 아저씨의 다소 신경질 적인 말투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고 버스 안은 몹시 고요했다.


가는 길에 풍경을 보고 음악을 듣고 잠시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지만, 위급 상황이다. 눈을 감고 내가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높은 주파수에 접속해 나는 진심으로 기사님을 위해 기도했다. 평온의 에너지를 전파하려고 애썼다. 나는 진심으로 기사님께 감사해했다. 속상한 무슨 일이 있음에도 나름 최선을 다해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하는 기사님께. 버스가 더 빨리 달릴수록 온 머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기를. 안전하게 모두들 도착하고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다행히 오늘 나의 운세는 95점이었다. 서울에 진입한 후 기사님은 한층 누그러졌고,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마지막 감사하다는 인사에 드디어 기사님은 대답해주셨다. 아주 기쁘고 감사했다. 예상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마을버스를 갈아타자 친절하고 젠틀한 운전을 해주셨고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감사함은 배가 되었다. 




라라 님과 가보고 싶었던 메밀국숫 집은 폐점했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샤브샤브를 먹기로 했다. 새로 온 손님이 두 테이블 밖에 없었는데 주문하고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이 만석이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콩국수와 흑임자 콩국수를 주문했는데, 먼저 나온 콩국수를 나누어 거의 다 먹어가는데도 흑임자 콩국수가 나오지 않았다. 주문이 잘못 처리되었는지 얼음을 띄운 또 다른 콩국수가 나왔고 라라 님은 우리가 주문한 게 아니니 취소해달라고 했다. 순간 나는 마음이 흔들려 그냥 먹을까 생각했는데 이미 배가 불렀고 우리가 먹고 싶었던 건 흑임자 콩국수였다. 오늘 나의 운세는 95점이었던 덕에 라라 님의 의견을 따르도록 분위기가 흘러갔다. 1인 1식이 필수인 식당에서 위가 작은 라라 님과 위가 작아진 나는 2인 1식을 아주 맛있게 적당하게 먹었다.


'오히려 좋았어요. 이미 배불렀거든요. 간식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가는 내내 올해 5월 날씨에 대한 찬사를 내뱉었다. 다신 없을 멋진 날씨들이다. 


어디 갈까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걷다가 라라 님과 내가 예전에 자주 갔던 카페 자리에 아주 젠한 요즘 감성의 멋진 카페가 새로 생겼고 커피도 디저트도 아주 훌륭하다고 했다. '안밀' 낙성대에도 이런 곳이 생기다니! 라라님의 표현대로 차단된 특별한 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을 주는 곳이다. 커피도 디저트도 너무나 훌륭해서 춤을 추고 싶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감탄사를 연신 내뱉았다. 무엇보다도 음악과 입구 통창이 우리가 오늘 만나 대화하기에 완벽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차분히 라라 님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을 했다. 


감사하다고. 명상에서 찾은, 아마 몇 세기부터 이어져온 나의 깊은 상카라 그걸 마주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어리석어서 이제야 선명하게 깨달았다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렸는데 지금 이걸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 줄 이유 없는데도 아플 게 분명한데도 기꺼이 해준 당신이 이끌어준 그 환경에 너무나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이전에 나우시카를 보며 라라 님을 떠올렸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은 여우다람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무섭고 두려워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나를 껴안는 라라 님을 마구마구 할퀴었다. 라라 님은 피가 나는데 나를 내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고 인내해주었다. 그 사랑이 너무 커다랗고 아름답고 상처 낸 게 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러니 꼭 직접 만나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했다. 


아마도 알고 계시겠지만 당신의 뜻을 부정하거나 멈추라는 뜻은 아니지만, 당신이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던 거 사실은 이미 다 줬다고. 이미 다 줬으니 그거 알고 계시라고. 왠지 꼭 말해주고 싶었다고.


라라 님은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거 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말로 이렇게 해줘서 더욱 기쁘다고 말해주셨다.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니. 나도 잘 몰랐던 걸 어떻게 아셨을까. 무의식은 중요한 무언가를 보내고 알아보나 보다.



내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나는 아마도 날씨가 너무 좋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퇴보한 적 없다. 뒷걸음질 치는 날조차 모두 전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계속 계속 걸어갈 거라고 기쁘게 웃으며 마주 보며 말했다.




우리의 동시성에 놀란다. 어쩌면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공통점을 찾고 싶어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해도 좋지만 우연적 일치는 언제나 놀랍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도 사람들과 거리감 있는 감상을 떠올릴 때도 그러했고 필라테스도 그러했고 아침형 인간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산책하는 모습과 운세를 매일 확인하며 조심하는 습관에도 늘 언제나 반갑고 우리가 함께라는 게 느껴졌다.


지난번에도 유사한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 한번 말했다. 라라 님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고 사랑만 할 거라고. 라라 님은 집착해도 좋다고 웃었지만, 이제 나는 사랑만 하고 싶다. 앞으로의 역할을 해내려면 그래야 한다.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의심 없이 여유롭게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다. 




라라 님 책에 싸인을 받았다. 기념으로 아껴왔던 킁킁 냄새를 이제는 맡아보기로 했다. 엊그제는 울산에 가서 고래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라라 님이 주신 마들렌엔 고래가 있었다.


당연한 필연, 그럼에도 신기하다. 우리는 어디서든 만났을 것이고 어떻게든 알아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삶에서 깜짝 선물처럼 대면할 때마다 언제나 놀라고 기쁘고 감탄한다. 중요한 미래는 이제까지 하나도 예측하지 못했다. 모두 다 예측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좋다. 


라라 님과 대화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이것 만큼은 운세와 상관없이 영원할 거다. 사정이 있어 아주 오래 대화를 나눌 수 없을 때도 그것 역시 나를 기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라도 다시 만나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을 테니.



사랑하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가 가진 가장 좋은 마음을 내주고 싶다.

오늘의 멋진 운세를 라라 님께 다 전해주고 싶었는데 정작 선물을 잔뜩 받아버렸다. 매번 이런 식이다.



집에 돌아와 킁킁 냄새를 맡고 얼그레이 마들렌을 먹으며 이 글을 썼다.

오늘 서울 하늘과 운세는 하루 종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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