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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06. 2023

26살, 나의 쿠바를 만났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운명보다는 우연을 믿는 사람이었다.

스물여섯 겨울, 배낭여행을 하다가 쿠바에 가보기로 했다. 두 번 더 연이어, 약 세 달간 쿠바에 머물렀다. 앞으로 함께하기 위해 나의 쿠바와 떠나기로 선택했다. 쿠바에 가기 전까지 내게 쿠바가 커다란 존재가 될지 몰랐다. 아니, 쿠바에 가면 어디에 가야 좋을지 몰랐을 만큼 쿠바에 대해 무지했다. 여행하며 만났던 많은 여행자들이 자꾸 쿠바에 관해 말했고, 그 이야기가 모두 달라 궁금했다. 내가 만나는 쿠바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직접 쿠바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쿠바엔 여름이 있었다.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 빛과 파란 하늘, 그 하늘색과 꼭 닮은 맑고 원시적인 카리브해가 있었다. 그땐 몰랐지만, 삶은 그곳에서 운명 같은 만남을 예정해 두었다. 그의 고향인 산티아고 데 쿠바 길거리에서 들뜬 마음으로 신나서 사진을 찍던 나는 알레를 만났다.


알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운명보다는 우연을 믿는 사람이었다. 신이나 삶을 믿어본 적 없었다. 가끔 신기한 일을 겪기도 했지만, 그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아 꽉 붙들곤 미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필연이나 운명의 상대라는 표현을 떠올린 적은 없었다. 그때까지 누구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의 연애는 순조롭고 안전했으며 이별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알레를 만나 쿠바를 여행했다. 산티아고데 쿠바, 트리니나드, 아바나, 첫 번째 여행은 재밌고 즐거웠다. 우리는 자주 격렬하게 다투었지만, 그와 함께하는 날들은 지루할 틈 없었다. 점점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가 꿈을 꾸고 모험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끝내기엔 아쉬워 두 번째 여행을 했다. 비냘레스, 시엔푸에고스, 바라코아, 그리고 다시 산티아고 데 쿠바로. 그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본 후에야 이미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질투, 좌절, 괴로운 감정에도 그를 놓지 못했다. 그냥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만 해주기로 했다. 그러자 그의 꿈이 새롭게 보였다. 


그의 첫 꿈은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알레는 보통의 남자로 보통의 일상을 보내기 위해 함께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가자고 말했다. 어떻게서든 미국에 도착한다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남은 여행을 계속하기보다 알레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 길을 함께 걷기로 했다. 계속 사랑해 보기로 했다.




세 번째 돌아간 쿠바는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둘이 되었고, 조용히 인내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의 그림자를 보았고 나는 시험에 들었다. 어떤 글을 읽으며 반해버려 응원하던 등장인물이 알레라는 진실을 알게 되어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고 그가 가진 사회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느낀 날엔 약간의 씁쓸함을 맛보았다. 그런 불완전한 상태에서 꿈을 향해 함께 쿠바를 떠났다. 



떠났다는 즐거움도 잠시 에콰도르에서 알레는 두려움에 휩쓸려 패닉 상태가 되었다. 힘에 겨워 그를 놓으려 할 때 그가 다시 사랑을 말했기에 나도 사랑을 말할 수 있었다. ‘나 계속 흔들릴 거야. 그렇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야. 내가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기 전까지 나를 절대 보내지 마.’ 우리는 다시 포옹할 수 있었다.



함께여서 가능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어둠 속에 발을 내디딜 용기를 냈던 건.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콜롬비아 국경을 건넜다. 그건 그의 운명이었기에 우주의 응답을 받으며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발이 묶여 두려움에 떨 때 우리는 차분하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돌파해 보자고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운 좋게도 그 동네 교회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목숨을 걸고 밤바다를 건넜기에 다음날 더 이상 보트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적극적으로 발로 뛰며 거기 가는 보트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알레, 나 어떻게 찾았어?

-우린 운명이잖아. 




우리가 사랑하기에 때로는 길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용기를 줄 수도 있었고 그럴 때 내 안의 용기는 배로 커져 그 시공간을 다 뒤덮을 수 있었다. 우린 밥 말리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온두라스에서 만난 이민국 남자의 거짓말 때문에 그를 잃게 될까 두려워 펑펑 울었고 길에서 만난 낯선 이방인의 사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길에서 자주 삶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유의 무게를 체감했다.




그 여정 중 정말이지 시험은 너무나도 많았다. 나를 이용하거나 내게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만났을 땐 진저리가 나다 못해 분노에 이르렀다. 멕시코에서 알레가 이민국으로 보내지고, 그와 떨어져 보냈던 나날들은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지루하고 비루하고 고단한 일상, 고립감에 지쳐가던 나는 그 앞에서만큼은 괜찮은 척 그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웠다. 


그건 알레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만나는 그 짧은 15분의 면회가 없었다면 거기서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어도 우린 서로를 믿고 의지했기에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함께 무사히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국에 입국하는 날까지도 힘겨웠고, 그동안 무리한 탓에 간신히 부여잡았던 나의 마음과 정신이 단번에 무너졌다. 두려움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기에 그를 떠나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그렇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그가 자유롭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꿈을 함께했던 그 선택을, 그를 사랑하게 만든 쿠바로 떠난 내 선택을.







널 사랑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알아? 널 만나기 전까지 내가 완벽한 남자인 줄 알았어. 아무도 내게 부족하다 말한 적 없었어. 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속상해 울잖아. 이 정도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너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야.


우리는 서로 만나 사랑하며 아주 단단한 벽으로 가로막힌 좁은 세계의 틀을 단기간에 깨부숴야만 했다. 서로가 살아왔던 삶, 생각, 가치가 뒤엉키며 흡수되어 충격파를 만들고 갈등을 일으키고 고통과 마주했다. 과거에 발목을 붙잡히고 싶지 않다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나약하고 어두운 부분을 대면하고 통합해야만 했다. 서로가 아니었으면 결코 발견되지 않았을 새로운 세계였다. 





알레를 만나 내가 제일 먼저 대면한 건 감정이었다. 그와 함께할 때면 조용히 모습을 감췄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태풍처럼 몰아쳤다. 나는 자주 중심을 잃었다.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아파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그를 모욕하고 비난했다. 나는 여전히 감정에 사로잡혀 마리오네트처럼 감정에 끌려다니고 있었고, 감정 때문에 괴로웠다. 그래서 감정을 더 이상 뒷순위로 제쳐둘 수 없어졌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알레 앞에서는 매 순간 나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채 여전히 조건을 달며 미워하고 있는지 그림자처럼 비춰볼 수 있었다.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화를 낸 순간들은 돌이켜보면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외부의 무언가를 갈구했고, 그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애썼기 때문에 생겨난 반작용이었다.



알레에게 용서를 배웠다. 용서가 정의나 도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내면의 행위이자 선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용서란 평화와 고요, 안정을 향하는 마음이라는 걸 그를 통해 보았다. 그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현실은 기꺼이 수용하고, 용서한다는 개념 없이 이미 용서하고 자신의 길을 기쁘게 걷는 사람이었다. 



알레에게 꿈을 꾸는 법을 배웠다. 진짜 꿈은 어떤 역경이 와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진정 자신의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거기엔 조용하지만 강한 확신이 함께 했고, 그 확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우주가 삶을 열어 준다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경험하게 했다.



알레를 통해 삶을 알게 되었다. 운명을 믿게 되었다. 알레가 아바나에서 추방당해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내가 거기 도착했던 일, 그 만남을 만든 선행 사건과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일어나야 할 모든 일들은 결국 일어나고 만다는 명제를 그와 함께한 모험을 통해 내 삶의 모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알레를 만나 사랑하게 된 덕분에 무의식 속 눈 감고 잠들어 있던 거대한 카르마가 의식으로 떠올랐다. 당시엔 고통의 원인을 오인했다. 그를 만났다는 이유로 괴롭고 힘든 줄만 알았다. 진심으로 온 마음 영혼을 다해 사랑하는 데도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이 많았음에도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사랑이 너무 아프고 어렵고 힘겨웠다. 나의 깊숙하고 원초적인 카르마, 그 오래된 상처가 조금이라도 건들어지면, 떠오르는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사실 그의 탓이 아니었는데 눈을 뜨기 전까지 그의 잘못인 줄만 알았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그 사랑을 뿌리치고 도망갔다. 그가 생각나도 그를 사랑하고 싶어도 나의 상처와 연동된 두려움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도망쳤다 생각했지만, 그 짙은 그림자는 다시 서서히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그림자를 대면하고 수용해서 그림자와 통합되기 전까지 카르마는 저절로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진짜 사랑은 나를 찾아올 수가 없다. 진정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사랑의 길을 걷고 싶다면 그림자는 미워하거나 피할 대상이 아니라 배움과 성장을 이끄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걸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알레와 헤어진 당시, 나는 앞으로의 과제가 현실에 적응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거라 믿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 후 모든 과정은 나의 그림자를 만나 통합하고 감정과 공존하며 내 안에 존재했던 진정한 평화와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 시작에는 알레와 쿠바가 있었다. 알레는 다음 세계를 열어준, 진정한 사랑의 세계로 향하는 관문을 열어준 고맙고 소중하고 특별한 인연이었다.






알레와의 자세한 이야기는 전자책 Mi Cubano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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