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 Dec 08. 2023

27살 여름, 랜덤 채팅으로 만났다.

동반자 Astin과의 첫 만남

나의 동반자이자 남편, Astin을 랜덤채팅으로 만났다. 내 말을 곡해 없이 들어줄 친한 친구에게는 사실대로 말했고 나를 걱정할 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소개로 만났다고 둘러댔다. 우리는 4년간 연애한 후 결혼했다. 

스물일곱 초여름 아직 그리 덥지 않은 한낮의 오후, 얼굴도 모르는 Astin을 처음 만났다. 




그 시기 나는 사랑에 지쳐 있었다. 한없이 외로웠다. 친구가 필요했다. 애인이 아니라 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느슨하고 담백한 친구. 서로 바라는 거 없이 아무 이야기나 편하게 해도 괜찮을 사람. 그래서 어느 밤 랜덤채팅을 했다. 


세 시간 넘게 채팅을 이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거칠 것 없는 대화였다. 그의 소개팅 실패담과 내가 왜 지난 사랑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서로의 과거를 탈탈 털어놓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편안했다. 그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때도 확신은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리고 나도 그에게 상처 줄 리 없다는 확신. 그래서 고민 없이 카톡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2주가 지나고 그는 우리 집 근처에서 일정이 생겨서 들리게 되었고 두 일정 사이 2시간쯤 시간이 붕 떠버렸다. 만나자는 그의 제안에 별 고민 없이 나갔던 건 언젠가 한 번쯤 봐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에 먼저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는데 그의 얼굴을 몰라 엄청나게 떨렸다. 나는 기도했다.

 

-제발 이상한 놈이 아니게 해 주세요.



처음 딱 그를 보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그의 인상은 선하고 밝았고 온몸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역시 안전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의 키가 작았다. 그게 좋았다. 그는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키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키가 작은 사람들은 누군가와 처음 만나게 되면 마치 경고등을 켜듯 자신의 키가 작다고 미리 고지하여 상대방의 기대치를 낮출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키에 열등감이 없는 사람인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를 이성적 상대로 바라보진 않았다. 그때 애인은 필요 없었고 당분간 이별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그와 나눈 대화는 참 좋았다. 별 말하지 않았는데 편안했다. 원래 알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고 2시간이 훌쩍 지나 그가 저녁 약속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기억에 남는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10분 만에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던 그의 경이로운 목 넘김이었다. 그렇게 커피를 빨리 마시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한 잔 더 권하는 내게 괜찮다고 말하며 대신 물을 한 컵 마셨다. 


지하철역에서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룰루랄라 기쁜 마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었다. 만나도 기 빨리지 않는 편안한 사람을 한 명 더 만났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3시간쯤 지나 그가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물었다. 어차피 망한 하루 좀 더 놀기로 했다. 역 근처 작은 공원에 앉아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 그리고 그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럴 줄 알았다. 꼭 좋은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될 것 같으면 사귀자고 말하게 되거나 듣게 된다. 그에게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경고 사인을 주었다.


-정신 차려! 난 지금 남자를 만날 상황도 아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 난 외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국에서 살 생각이 없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 보기보다 복잡한 사람이야. 나랑 엮이지 말고 기회를 줄 때 도망쳐. 빨리 도망가라고.


그는 곱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밀어내는 나를 와락 안았다. 


-그래도 나는 너를 만나고 싶어. 네가 떠나야 한다면 그때까지만 날 만나도 좋아. 그냥 지금 너랑 만나면 행복해질 거야. 미래의 일은 미래에 고민해 보자.


하루 정도 고민했지만 결국 그를 만났다. 나는 확신 있는 사람에게 약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리될 줄 알았다. 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랑을 덮어 두고 떠나지 못한다. 끝을 확인해야 한다. 상상과 가설로 만족할 수 없었다. 책을 한 번 펼치면, 재밌어 보이는 책을 발견하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나도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때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를 만나면 내 삶이 통째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걸. 한국에서 떠나지 못하고 안정적이고 따뜻하고 안락한 일상을 추구하게 될 것이란 걸. 그래도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첫 만남이다.




-넌 언제 나랑 사귀겠다고 생각했어?

-카페에서 처음 봤을 때

-진짜? 전혀 그런 분위기 아니었잖아.

-그랬지. 저녁 약속에 갔는데 집중이 되지 않더라고. 널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연락하고 있었어. 카페에서 뭔가 내 감정이 증폭되었어.

-와~ 너 그때 카페에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난 네가 내게 관심 있는지도 몰랐어."

-티가 안 나나 봐."

-설마... 그때 우리가 결혼할 거란 것도 알았어?"

-결혼해도 좋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결혼하면 참 좋겠다."

-말도 안 돼!



Astin은 겉으로 보기에는 편안하고 무난하고 한없이 착해 보이지만,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사람들이 많이 속는데 보는 것만큼 한없이 착하지 않다) 그는 내게 한 번도 화를 낸 적 없고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에 대해서 분노를 보이지 않는 평온한 심정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게 피나는 노력 끝에 달성한 특성이 아니라 그저 타고난 심성이란 걸 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평온과 평화를 내재한 채 태어난 사람 같았다.


Astin은 나와 관심사가 확연히 달랐다. 만나는 사람도 흥미를 느끼는 대상도 좋아하는 이유도 완전히 달랐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똑같이 좋아함에도 그 이유는 정반대다. 그는 우주를 현실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영상과 웅장한 OST가 좋아 그 영화를 몇십 번 보았고 나는 그 안에 담긴 운명적인 메시지와 사랑에 감동해서 그 영화를 좋아했다. 그가 좋아하는 여행은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새로운 시공간에서 새로운 정보를 모으는 데 있었고 나는 다른 사람과 만나 상호작용을 하고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때문에 여행을 좋아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가끔 내가 물어본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이 너무 뜬금 없고 엉뚱해서 나는 종종 웃음을 터트렸다. Astin은 영화도 드라마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자신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작품들은 절대 보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빠지면 몇 시간이고 영상들을 정주행했고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감정이 동기화되는 작품들을 사랑했다. 반면 Astin이 궁금해하고 신경 쓰는 온갖 정보들과 불균형에는 아무런 관심이 가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로 취향과 성향이 다르면 그다지 친해질 이유가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Astin은 내 이야기를 듣는 걸 재밌어했다. 나는 Astin에게 감정의 표현과 더불어 내면과 가치관이라는 세상을 열어줬고, 그는 내게 평화와 안정을 선물하고 세상과 조율하는 온건한 방식을 가르쳐줬다.


무엇보다도 Astin앞에서 나는 아이처럼 존재할 수 있었다. 내 모습 그대로 욕망에 충실하고 숨길 거 없이 내 존재를 드러내도 되었다. 내가 무슨 결정을 내려도 그는 나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었다. 그와 다른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그를 보며 나는 자유를 느꼈다. 


결혼이 하고 싶어서 Astin을 만난 건 아니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관념은 내게 너무 무겁고 갑갑했다. 그를 만나서 그런 세상의 관념적인 결혼이 아니라 우리의 결혼은 우리만의 이야기로 써 내려갈 수 있을 거라고, 그 안에서 나는 지워지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그를 알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첫 만남이 대단하고 신기하게 여겨진다. 그는 평소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거나 상대를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여자에게 만나자고 박력 있게 말하는 타입의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의 삶의 모토는 ‘그럴 수도 있지.’였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상황이나 사람을 바라보면 그다지 화 날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둥글둥글 무난하고 무해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널 만날 수 없다는 나의 거절에는 평소처럼 그럴 수도 있다고 반응하지 않았다.아마 우리의 인연이 이어지고 이 운명이 완성된 건 그의 용기 있는 선택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날 그는 운명이 가르쳐주는 내밀하고 모호한 신호를 선명하게 잡아내어 망설임 없이 내게 향했다. 그의 용기가 내게도 닿았다. 서로의 우주를 포개 더 크고 광활한 우주로 아름답게 가꾸어 보자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