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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11. 2023

30살, 책은 태어나고 싶다 말했다.

진정 내 책을 기획한 건 나의 운명이었다.

서른 살 여름 동안 준비를 마친 나의 첫 책 Mi Cubano는 이듬해 가을 탄생했다.


나의 첫 책은 내가 만들지 않았다. 내 책은 독립출판물로 글부터 사진, 디자인, 편집, 발행부터 판매까지 어느 것 하나 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진정 내 책을 기획한 건 나의 운명이었다. 태어나고자 했기에 그저 내 손을 빌리고 내 삶을 발판 삼아 책은 태어났다.




책은 먼저 다시 나를 쓰게 만들었다. 그 책의 프롤로그를 쓰기 전까지 책에도 글에도 내 삶은 멀어져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죽을 것 같은 나날 터트리듯 비밀 일기를 쓰고 가끔 블로그에 짧은 글을 올렸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책 한 줄도 읽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그때까지 일기나 보고서, 자기소개서 정도가 내가 써본 글의 전부였다.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글을 써본 적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 회사에 다니며 일이 차츰 익숙해진 어느 날, 조금도 생산하지 않는 나날이 지루했다. 회사 일 외에 즐겁게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보니 문득 글쓰기가 떠올랐다.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욕구는 있었으나 기왕이면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곳이 암호화폐 ‘스팀’에 기반한 새로운 글쓰기 플랫폼 ‘스팀잇’이었다. 


당시 스팀잇은 ‘글 하나만 잘 써도 치킨 한 마리 값을 벌 수 있다’는 홍보 기사가 날 만큼 나름대로 기대를 받던 플랫폼이었다. 암호화폐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고 글로 돈을 벌겠다는 기대는 없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왠지 그곳이 끌렸고, 거기서 글을 쓰면 마음이 편할 것만 같았다. 



스팀잇에 글을 쓰는 건 역시 재미있었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즐거웠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일상과 생각을 나누고 소통하는 과정은 더욱더 재밌었다. 차츰 스팀잇이 좋아졌다. 내가 스팀잇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뭐 없을까 떠올리자 묵혀 두었던 소재가 떠올랐다. 글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전문 분야의 지식을 나눌 재능은 없었다. 내가 그곳에 줄 수 있는 건 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적는 것뿐이었다. 흔치 않았던 특별한 경험, 소중하게 마음속 깊이 간직해 왔던 이야기, 그것은 알레와 쿠바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스팀잇에서 연재되었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글을 완결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슴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쓰고 싶은 열망과 동시에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나 걱정되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첫 1화를 올린 날 글이 재미있다며 계속 써달라는 응원의 댓글이 없었으면 그렇게 신나게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미친 사람처럼 글을 썼다. 매일 짬이 나는 틈마다, 퇴근하고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글을 썼다. 그 글을 쓰고 읽으며 가장 기뻐한 사람은 나였다. 글은 마지막 온 점을 찍는 순간까지 막힘없이 흘러갔고, 내게 충만함과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완결하고 나서도 오래도록 행복하고 뿌듯했다. 그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나는 그 글에 더 바라는 게 없었다. 요구한 적 없는데도 그 글을 매개로 멋진 사람들을 만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인연이라는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책은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내 글을 읽고 친해지게 된 동네 언니가 이건 우리만 읽기에 좀 아까운데 책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 없냐고 넌지시 물었다. 독립출판물을 어떻게 만들어 주는지 알려주는 강좌가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가슴 안에 고동처럼 울려 퍼져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마치, 책에 조종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나의 의중 같은 건 상관없다는 듯 책은 신나서 춤을 췄다.


독립출판물 강좌를 듣는 경험 역시 즐거웠다. 강좌 자체도 실용적이고 유익했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도 좋았다. 2주 차 때 조판을 만들어 오는 과제가 있었는데 밤을 새워서 엄청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한 주 만에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완성해 오자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다. 그때 책은 자기가 완성되는 날까지 나를 재우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게 에너지를 자꾸 보내고 또 보냈다. 


결국 책은 태어났다. 


당시엔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나의 단점까지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나를 쏙 빼닮은 책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 책은 너무 나 같았다. 디자인은 조잡했고, 맞춤법은 엉망이고 모든 게 다 어설펐다. 그 책은 과감하고 지나치게 솔직하면서 감정적이었다. 진심을 다해 영혼을 담아 사랑으로 그 책을 쓰고 만들었지만,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나는 나조차도 내가 무엇을 쓴 건지 왜 그걸 써야 했는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을 위해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이 든 날, 나는 책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내 손을 떠났어. 너의 길을 가. 결과가 무엇이든 겸허히 받아들일게.’ 


그때까지도 대체 그 책이 왜 태어나야 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운명이나 결과는 눈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사건의 도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그 책이 많이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책이 영상화된다거나 다음 책이 또 나오거나 하는 놀라운 결과물들 말이다. 의도하거나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책이 생물처럼 태어나고 싶다고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며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기 때문에 나 역시 그 책의 운명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런데 역시, 그다지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벌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만 책을 놓아주기로 했다.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열망을 거부할 수 없다. 거기에 필요한 자원들과 관계가 자석처럼 굴러 들어오고 도저히 가만히 있거나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가 몸에 흐르기 때문이다. 일은 저절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 일이 내게 행복과 충만함을 선물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전념 외엔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일이 차례대로 마법처럼 벌어진다. 내 영혼이 원하는 선택지를 드물게 인간적인 내가 일치된 선택을 내릴 때, 운명은 여지없이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나를 이끈다. 비록 그곳이 어디인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전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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