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 Jan 12. 2024

그럼에도 라다크

4월, 라다크 춘자로드에 함께하기로 했다.

무언가가 시작할 땐 항상 눈을 크게 뜨려고 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엔 그게 어떤 이야기가 될지 짐작도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놀라게 하는 이야기를 수집하는 게 좋아.



더 이상 선택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다. 알레도 날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고 Astin도 날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둘 다 내 선택을 존중하고 변함없는 애정을 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정도 차츰 안정이 되었다.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단단히 고장이 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나도 안 괜찮은 상태로 괜찮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멀쩡했고 건강에 이상도 없었다. 지루한 일상의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온몸이 불투명한 막으로 덮여 무감각했다. 예전 같으면 신나서 기뻐할 만한 일이 일어나도 막에 막혀 느낌이 전달되지 않았다. 슬프거나 화나는 일이 생겨도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삶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흥미를 완전히 잃은 무채색 무감각 인간이 되었다. 이건 산 자의 상태가 아니었다. 죽음에 가까웠다.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고장 난 채로 맞이한 서른넷의 봄 그리고 4월, 라다크 춘자로드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 해 유일하게 내 심장이 반응한 일이 그거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망가진 상태로 다른 사람들과 여행을 가는 게 좋은 결정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올해 들어 하고 싶다, 내킨다고 반응한 일이 그거 하나였기 때문이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거나 어떤 일로 불참한다 해도 실망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붕괴된 나 이외엔 진정으로 날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었다. 참가 신청 메일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춘자 님께 답장을 받았다. 



‘스텔라가 창조한 세계가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요.’


답장의 첫 문장을 보고 오랜만에 슬픔이 번졌다. 그녀와 메일을 주고받는 순간만큼은 회색 막 사이를 관통해서 약간의 기쁨이 전해졌다. 오랜만에 설렜다. 그녀가 나쓰메 소세키의 수필 일부를 발췌해서 마지막 메일에 동봉했다.


손님이 돌아간 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마 내 병만이 아닐 것이다. 내 설명을 듣고 농담이라고 여기며 웃은 사람, 알아듣지 못하고 잠자코 있던 사람, 동정심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모르는, 또한 자신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지속되고 있는 것이 얼마든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들의 가슴에 울리는 커다란 소리로 그것이 한꺼번에 파열된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기억은 그때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리라. 과거의 자각은 이미 사라져버렸으리라. 지금과 옛날, 그리고 그 이전 사이에 아무런 인과를 인정할 수 없는 그들은 그런 결과에 빠졌을 때 자신을 뭐라고 해석할 생각일까. 결국 우리 각자는 꿈꾸는 사이에 제조한 폭탄을 안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게 아닐까. 다만 어떤 것을 안고 있는지 남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기에 행복한 것이리라.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





라다크에 갈 준비를 하면서 내 무의식 속 심어진 깊은 역동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번 생은 모험을 떠나려 할 때마다 가족과 관련한 이슈가 나타나 길을 방해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다크 일정 한가운데 Astin 여동생의 결혼식이 잡혀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나를 저버리는 선택을 내렸기 때문에 이번에도 발목이 잡히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에 불참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Astin이 차분한 어조로 두 개 다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며 일정을 조율하면 어떻겠냐고 부드럽게 권유했다. 반발심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현명한 조언이었다. 모험을 포기하지 않고 가족과 마찰을 겪지 않는 대안지가 있었다.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다음 날 아침 라다크로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갔다. 한 달이란 시간이 제법 길어 부모님께 여행에 관해 미리 알려드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과거 쿠바에 가느라 연락이 두절된 나를 온 가족이 걱정하며 한바탕 난리가 났었고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진 않았다. 엄마에겐 미리 말해 두었고 아빠에게도 따로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전화를 받은 아빠에게 라다크에 한 달 정도 여행하기 위해 공항에 와있다고 말했다. 아빠가 말했다.


-넌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왜 늘 네 생각밖에 안 해?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속에 울분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걸 알았고 내 선택을 지지하고 존중해 줄 거라고 요만큼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그저 조금 걱정을 내 비추는 선에서 끝을 낼 줄 알았던 평소 과묵하던 아빠는 한발 더 나아가 나를 나무라고 비난했다.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고? 진짜 이기적인 게 뭔지 보여줘?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데! 내가 왜 운명의 길을 따라가지 않았는데? 내가 왜 나를 부정하고 이렇게 완전히 고장 나야 했는데.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인데. 나도 가족을 생각하는데.’


억울하고 슬펐다. 어차피 한국에서 지내도 부모님을 한 달 정도 못 보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저 무채색 인간으로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뭐라도 하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아빠는 내가 Astin을 버려두고 아내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제멋대로 여행을 간다는 자체가 부당하다 비난했다. 정작 당사자인 Astin은 날 응원하며 지지해 주었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격려해 주었지만 참작 사유가 되진 않았다. 아빠는 나의 삶과 욕구보다는 가족의 역할, 아내의 역할이 우선이기에 내가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분노와 서러움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어차피 아빠의 생각을 바꿀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 아빠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있고 아빠의 가치관이 있다. 나는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 머리로는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아빠에게 화를 내지 않고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가해지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분노가 가라앉자 더 길고 아픈 슬픔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다행히 인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내 양옆 앞뒤로 다른 손님이 없어서 편하게 다리를 쭉 펴고 간 덕에 평소라면 뻐근했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항공사 기내식은 맛있었고 승무원은 친절했다.

 

인도는 처음이고 경유지인 델리에 관한 무시무시한 소문을 듣고 긴장한 상태였는데 모든 게 예상보다 너무 수월했다. 공항에 사람도 별로 없었고 아무도 내게 사기를 치지 않았고 꾀를 부리는 택시 기사를 잘 어르고 달래서 호텔 앞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호텔은 깨끗하고 넓었고 직원은 무척 친절했다. 확정 페이지가 보이지 않아 인천공항에서 나를 걱정시켰던 항공권도 무사히 확인되어 마음이 편안했다.


잘 자고 일어나 상쾌한 컨디션으로 다음날 무사히 국내선 공항까지 도착했다. 델리에서 레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히말라야 설산을 처음 보았다. 비록 비행기 날개에 설산이 가려졌지만 그럼에도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고산에 적응하기 위해 1L의 물을 천천히 나눠 마셨다.




5월 22일 아침을 잊을 수 없다. 레에 도착하자마자 반했다. 차가운 바람과 황토색 흙 산이 감싼 고요하고 작은 공항. 코로 전해지는 청명하고 시원한 공기, 여기가 레구나. 여기가 라다크구나. 


공항 밖에는 낯익은 얼굴 둘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막 달려가 포옹했다. 레에서 그들을 만나다니! 신기하고 반갑고 너무나 행복했다. 행복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는 춘자 님과 젠젠 님이 나를 보고 반가워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환영의 의미로 부드럽고 하얀 타카를 목에 걸어주었다. 


-잘 왔어, 스텔라!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아무리 고장이 나 있더라도 라다크에 온 건 운명이었다. 그들이 써 내려간 ‘카페 라다크’라는 책의 한 꼭지를 읽은 순간, 언젠가 꼭 라다크에 가보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그 순간, 운명은 아마 그들과 함께 라다크에서 시간을 보내라며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줬을 것이다. 





라다크는 아름답지만, 고산 지대이기 때문에 방문한 여행객 중 반 정도는 지독한 고산병에 시달린다고 했다. 누가 고산병에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실제로 가보기 전 그건 그저 확률에 불과하다. 왠지 괜찮을 것 같았는데 생각대로 나의 고양이는 살아 있었다. 그들이 가족처럼 지내는 Palu Guest House에 나도 묵게 되었다. 내 방은 3층 맨 안쪽 방이었는데 와- 너무 아늑하고 마을 뒤로 웅장한 설산이 함께 보이는 멋진 뷰가 비치는 통창이 양 벽면을 차지했다. 침대는 널찍했고 방은 깨끗했다. 


-스텔라를 위해 가장 좋은 방으로 준비했어요.


방이 준비되는 동안 짜이와 쿠키를 먹었다. 오늘 하루는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푹 쉬는 게 좋다며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을 방까지 배달해 주셨다. 그들의 애정과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랜만에 삶에 감사했다. 라다크에 오길 잘했어.




다음날이 되고 나도 모르게 그녀들 앞에서 고백했다. 어려운 선택을 했고 분명 내가 한 선택인데 확신이 없어 고장이 난 상태라고. 나는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고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해 길을 잃어버렸다고. 어느새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내 말을 들은 그녀들은 나 대신 주르륵 눈물을 흘려주었다.


-스텔라, 그걸 운명이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야. 그게 운명이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야. 그것도 선택이고 그것 역시 스텔라의 운명인 거야. 그렇기에 이전의 자신을 부정할 이유가 없어. 모든 건 그대로야!


-뭐가 되었든 라다크에 정말 잘 왔어요. 우리 라다크에서 많이 웃고 행복한 시간 보내요.


그 말이 진심으로 이해된 건 아니었지만 그녀들이 나를 꼭 안아주었기에 괜찮을 것만 같았다. 라다크에서는 행복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들에게 라다크는 행복의 원형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자 관찰자가 되겠지만 그들의 사랑과 행복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염될 만큼 힘이 세니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모든 게 괜찮지 않았다.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지만, 설산과 레는 눈이 부시게 장엄하고 아름답고 신비하니 이 마법 같은 시공간에서 탄생할 기쁨과 행복들을 억지로 막지 않을 거야.



당신이 무엇을 했건 - 이 지상에서 당신이 지녔던 수많은 삶에서의 가치를 통해 -그것은 결코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지금의 당신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던 삶의 경험이었다. 또한 그것은 가장 귀하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당신이 이 놀랄만한 여정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의 당신이 가장 위대하며, 당신의 지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엇을 했건 - 그것이 아무리 비열하고 형편 없더라도 -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한 배움을 창조할 목적으로 그 일을 한 것이다. 배우는 동안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하고, 자신을 망친 적도 있었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들을 박차고 일어섰다.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당신은 이제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고 포용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이트북, 람타, 316p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전 22화 조용하고 완전한 붕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