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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15. 2024

라다크는 행복 치트키

라다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했다.

레 궁전을 걷다가 홀로 마주친 풍경


아마도 내가 그리워할 라다크의 순간들은 숙소 창문 너머로 보이던 룽타의 휘날림. 그에 곁들여진 설산과 멀고 가까웠던 하늘, 오후 9시 반쯤 들려오는 자팔의 노크 소리, 온수가 담긴 보온병을 건네는 그의 손, 불어 터진 파스타를 싹싹 먹는 포크 소리, 처음 맛본 육포와 사랑에 빠져 ‘줄레’ 개인기를 뽐내는 심뚝과 그걸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미소 짓는 사람들의 온기, 양첸이 내어준 파파야의 달콤한 맛.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갈망하면서 부지런히 수집하는 건 지극히 일상과 닮은 순간이다. 사소하고 소박한, 생활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일상의 한 조각. 여행지에서 그 일상적 경험을 마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 얼마나 다양한 관계의 파고를 경험해야 하는지 알기에 게으른 여행자로서는 그 정도 별거 아니라는 듯, 오자마자 그것들을 턱턱 내어주는 라다크가 특별하다. 여기엔 시절 인연을 성실히 차곡차곡 쌓은 거대 아카이브를 간직한 춘자 팀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앞질러 과거를 보듯이 현재를 곱씹는 그 의식은 제한적이고 특별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엇이 오든 그저 좋을 거라는 확신을 발견할 때, 마음이 저절로 열릴 때, 현재를 놓치지 않고 200% 즐기고 싶다는 의지를 명확히 붙잡고 있는 몇 안 되는 그 순간, 운 좋게도 바로 지금 여기 라다크에 있다(2023.05.24).



라다크의 손님맞이는 따뜻하고 맛있는 짜이 한잔을 과자와 함께 내어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이라면 같이 먹자 손을 붙들고 차를 비우면 한 잔을 더 권했다. 특히 우리가 묵은 게스트 하우스 Palu는 춘자 팀의 경험담에서 들은 것처럼 다 먹지도 못할 정도로 풍족한 양의 음식을 코스로 대접해 주셨다. 배불러 더는 먹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우리를 양첸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라다크가 내어 준 모든 짜이를 기억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맛있었고 그 맛이 모두 달라 더 좋았다. 누가 라다크 여행이 어땠냐고 물어보면 정말 행복하고 모든 게 다 좋았다고 감사한 기억만 잔뜩 쟁여왔다고 넘치는 애정과 사랑을 받았다 대답할 것이다. 




라다크에서 보는 하늘이 좋았다. 맑은 날은 맑은 날 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았고, 선명한 쌍무지개를 보았고 신비한 햇무리를 처음 경험했다. 숙소 창가에서 빛나는 보름달을 봤다.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는 아름다운 보름달.


내가 경험한 라다크의 날씨는 듣던 것과 조금 달랐다. 자주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별을 보러 한레에 가지는 못했다. 라다크는 예상보다 추웠고 머무는 동안 여름이 오지 않아 내내 긴소매 옷을 입고 점퍼를 걸쳤다.




첫 판공초 투어를 떠났을 때도 날이 궂었다. 따뜻하게 입고 왔는데도 밤이 되니 한기가 느껴졌다. 밤사이 눈이 내려 마당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아름다웠으나 돌아갈 길이 걱정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으레 있는 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릴 안심시켜 주었다. 몇 시간 후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눈이 다 녹아 어제 본 잔디밭이 드러났다. 눈이 온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춘자 님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파드마삼바바 님께 기도했고 자기 기도는 힘이 세니 자기를 믿어보라 말했다. 거짓말처럼 돌아가는 길 판공초로 향한 그 순간 날이 맑게 갰다. 판공초에 구름이 둥둥 뜬 하늘의 반영이 비추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우유니 사막이 떠올랐다. 신비하고 신기해서 우리 모두 아이처럼 신나 사진을 마구 찍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판공을 간직하고 싶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판공 판공 하는구나 들떠버렸다. 우리가 돌아갈 시간 마법은 끝이 났다. 다시 날이 흐려지고 비가 매섭게 왔다.





한레에 갈 수 없던 사정 덕에 빨레의 할머니 댁이자 고향인 돔카르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춘자 팀뿐 아니라 라다크 친구들도 함께한 피크닉 같은 여행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그 여행은 어떤 여행보다도 완벽했다. 돔카르의 고요한 평화를 잊지 못할 거다. 바위산과 푸른 숲 대자연과 그 안에 점이 된 우리를 잊지 못할 거다. 설산에서 먹은 춤을 추게 만드는 XXL 불닭볶음면을 잊지 못할 거고 모두가 췄던 광란의 댄스를 잊지 못할 거다. 냇물 바위에 앉아 설산을 바라보며 각자 조용히 명상하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할 거다. 함께 마신 창의 시큼한 맛을 잊지 못할 거고 그날 본 쏟아질 듯 많은 별과 깜짝 등장했다가 곧바로 사라진 별똥별을 잊지 못할 거다. 그날 들은 인생 최고로 무서웠던 괴담과 어설픈 스트레칭과 요가, 두툼한 이불의 무게를 잊지 못할 거다. 밭을 매던 귀여운 할머니들의 행렬과 밭을 가르며 활기차게 뛰어가는 아이가 그린 선 하나를 잊지 못할 거다. 아니 그때 만난 이들, 기꺼이 함께한 이들과 나눈 그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다 함께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엉망이 된 몰골로 돌아가던 길 들었던 음악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우리가 온다고 할머니를 들들 볶으며 노심초사했던 빨레의 소중한 마음을 절대 잊지 못할 거고 일을 미루고 그곳까지 함께 해준 초모와 고된 운전을 해주면서도 시종일관 농담을 멈추지 않는 싱게의 친절함을 영원히 기억할 거다.


떠나기 전 유독 초모리리를 보고 싶어 하던 나를 위해 무리한 당일치기를 함께 해준 그 마음에 나는 기뻐서 울었다. 얼렁뚱땅 꿈꾸듯 떠난 초모리리에선 꿈같은 마법이 가득 펼쳐졌다. 야생말과 간신히 찾은 한 마리의 마멋, 하늘과 산, 호수는 가지각색 빛으로 물들고 일몰이 지는 초모리리는 그 어느 곳보다도 그날의 판공보다 더 아름다웠다. 






라다크에서는 유독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 길었고, 아직 나는 온전치 않아 그 모든 기쁨을 평소처럼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날엔 그저 잠만 자고 싶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많이 지쳐버렸을 땐 역시 기쁨을 느낄 수 없었고, 그럴 땐 내가 다시 고장이 난 상태라는 걸 실감해서 조금은 낙담하기도 했다.



판공초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많이 아팠다. 예기치 않은 폭설로 창라 고개가 막혀 해발고도 5,000m 이상의 도로에 긴 시간 갇혀버렸다. 괜찮은 줄 알았던 고산 증세가 심해졌다. 손톱이 퍼렇게 질리고 머리가 아프고 입술은 자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 아프지 않았다. 아픔을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정신을 잃고 한 번도 깨지 않는 잠을 한동안 잤다. 인생에서 의식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무방비 상태가 된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과 있을 때는 긴장의 끝을 결코 놓친 적 없었다. 


처음이었다. 나를 완전히 놓고 상황에 나를 맡겼다. 거기엔 산소통을 미리 준비해 두고 앞뒤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차를 돕고 우릴 어떻게든 집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애쓰던 우리의 기사 무사가 있었고, 나를 나보다 걱정하며 자신의 점퍼를 내주고 내 손을 주무르고 응원의 말을 하고 농담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춘자 님과 젠젠 님이 있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배려해 주며 앞자리에서 묵묵히 고통을 견뎌낸 피터 님이 함께 있었다. 우린 창라에 갇혀버렸지만 다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아무 역할을 할 수 없었는데도 괜찮다고 등 두드려주는 사람들에게 기대어 부드러운 손길에 내맡긴 채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한 경험이. 내게 라다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했다. 


그 친절에는 대가가 없었다. 애정을 주고 넘치도록 사랑을 일깨워주었다. 내 마음에 짙게 깔린 무채색 회색빛 필터가 나도 모르는 사이 채도가 조금 채워져 있었다. 그건 모두 함께해 준 사람들 덕분이다. 라다크가 좋았던 이유는 그때 만난 모든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고 함께 했던 이들과 나눈 마음 덕분이었다. 라다크의 대자연은 신비롭고 장엄하지만,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사랑은 더 위대하고 아름다웠다.


‘아, 나는 여행을 좋아했지. 여행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신비한 일에 기뻐하던 사람이었지. 거기서 만난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채우며 감사하던 사람이었지. 그래, 나는 여행가이자 모험가였지.’




아마 평소처럼 불투명 회색 막이 벗겨진 상태에서 라다크에 왔더라면 사람들에게 조금 더 적극적이고 친절했을 것이다. 더 많은 일이 생기고 더 다채로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기쁜 일에 더 크게 기뻐하고 더 많은 감동을 하고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받았다. 그저 많이 받기만 했다. 다 받을 수 없을지라도 마음을 모두 열 수 없었을지라도 그 다정한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스스로 잔인하게 굴지 않고 그저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 가지 확신이 있다면, 그때의 나를 치유하고 소생시키기에 라다크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을 것이라는 거다. 내 운명은 삶을 재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라다크는 역시 행복 치트키였다.



소중한 그날의 마법 같은 초모리리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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