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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19. 2024

가을에게 머리를 맡겼다

가을 안녕. 드디어 내게 와줘서 고마워.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아직도 어느 정도 의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결정이란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116p




가을이 왔다. 날이 선선하다. 높고 청명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끝내주게 좋은 날씨가 되었는데도 나의 상태는 그리 나아진 게 없었다. 여전히 무감각하고 아무 의욕이 없었다. 내심 가을이 되면 조금은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땐 몰랐다. 가을이 아주 천천히 오고 있었다는 것을, 올해의 단풍이 물들기까지는 예년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니 더 많은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밤이었다. 까닭 없이 책장에 꽂힌 네빌 고다드의 책에 손이 갔다.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업은
나의 관념을 위대함으로 채우는 것뿐이다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아하의 순간이 찾아왔다. 더 이상 운명을 모르겠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과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나의 자아 관념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래, 다시 해보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오랜만에 별다른 이유 없이 마음에 충만감이 조금 돌아온 게 느껴졌다. 전날 저녁까지 명절 연휴 동안 가족들을 만나 보내는 시간이 귀찮고 무감각한 의무에 불과했는데 차에 타서 파랗고 맑은 하늘을 보고 한강을 바라보는 순간이 즐거웠다. 그동안 매번 반복되는, 업데이트되지 않은 재생목록 음악 소리가 지겹게만 느껴졌는데 노래가 그날 다시 듣기 좋아졌다. 


완전한 건 아니지만 충만감이 분명 돌아왔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웠고 농담을 나누는 것도 좋았다. 그 시간을 진심으로 즐겁게 보내는 게 오랜만이었고 활력이 넘쳤다. 내일 일정도 잘 소화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서른셋과 서른넷 각성 버전의 나는 누가 나에 관해 부정적인 피드백이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별다른 타격감이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걸 다른 이에게 굳이 확인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게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기에 그 소리를 흘려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장이 나서 무감각하고 공허한 잿빛 필터의 나는 주변의 소식과 목소리에 격하게 나부끼고 흔들렸다. 그들의 신호와 목소리 중 가장 잔인하게 날 아프게 만들 문장들을 쏙쏙 골라내어 몇 번이고 반복 재생하며 나 자신을 괴롭혔다. ‘이게 너야. 이게 건방지고 오만한 운명론자의 말로라고.’


아직 어둠으로부터 나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때는 기뻤지만 부정적인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을 듣게 되면 그 에너지를 조금도 방어할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위해 그런 사람과 자극으로부터 도피하곤 했지만, 약간의 찰과상을 입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0월 중순, 오랜만에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의 기분 좋고 멋진 소식이 담긴 피드를 보게 되는데 가슴이 콕콕 쓰리고 너무 아파 당황스러웠다. 


-질투하는 거야? 그들이 성취한 업적과 비교해서 지금 방에 갇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슬픈 거야?


-아니, 그것만은 아니야. 지금 내가 나 자신의 영혼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그 영혼과 일치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퍼. 


-아, 그럼 넌 행위 자체가 부러운 게 아니네. 그걸 못해서 슬픈 게 아니네. 너 자신과 멀어져서 슬픈 거네. 


-응, 내가 찾고 싶은 건 상태야. 그건 다른 사람과는 관련 없는 일이야.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지. 내가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그 상태. 안정감이 느껴지고 내게 친절하며 기쁨의 활력이 솟아나는 그 상태. 오늘이 행복하고 감사하고 내일은 내일의 모험이 올 것이란 기대가 있는 상태. 내가 완전한 본연의 나 자신, 나 그대로 살아도 충만하단 느낌을 받는 그 상태. 


-응. 운명을 믿지 않아도 운명론자가 아니더라도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응 나는 그걸 원해. 나는 사랑을 원해. 내가 진정 원하는 건 사실 그게 다야.





서른다섯 가을엔 미용실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미용실에 갈 의지와 기력이 생겨났다. 허리까지 엉망으로 자란 머리를 볼 때마다 미용실 생각을 했는데 모른 척했다. 거기 갈 힘도 없었고 큰돈이 드는 것도 싫었고 머리 스타일 같은 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긴 머리를 홀가분하게 잘라내고 다시 가장 좋아하는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싶다는 애정 어린 마음이 생겼다.


그날 저녁 고심해서 미용실을 예약했다. 그땐 거리가 가깝고 왠지 리뷰가 괜찮아 보였고 무엇보다도 내일 당장 머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단 이유로 거길 선택했다. 과거 미용실에 가는 행위는 좀 부담스러웠다. 별 관심 없어 방치해 둔 내 머리를 보며 한숨을 쉬거나 격한 조언을 해주는 미용사를 만나면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미용실에 갔다. 가게는 재작년에 우연히 발견한 연꽃이 가득했던 숨겨진 아지트 같았던 호수 옆 상가 건물에 있었다. 원장님은 차분하고 친절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소중한 걸 다루듯이 머리를 만져주었다. 점쟁이처럼 하나하나 내 머리의 성향과 역사를 맞추셨다. ‘파마하시면 거의 2년 정도 유지가 되시죠?’ ‘오! 네 맞아요.’ ‘잔머리가 많아서 앞머리가 좀 애매하시죠. 굵은 구르프를 말면 관리가 쉬우실 거예요.’ ‘원래 그런 거 안 하는데 한번 해 볼게요!’ ‘고객님 머리는 층을 많이 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부스스하게 보일 수 있어서 층은 살짝만 칠게요.’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이야기가 이어졌다. 원장님은 갈비가 맛있는 집을 소개해 주시고 나는 탕수육이 맛있는 집을 추천했다. 미용실 거울엔 귀여운 시바견 일러스트가 붙어 있었다. 그녀의 반려견도 시바견이라고 말했다. 강아지 이름은 케이시였는데 포켓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자 많이들 묻곤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불린 이름을 갑자기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르면 강아지가 헷갈릴 것 같아서 원래 이름을 계속 쓰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하셨다.


머리를 하는 내내 많이 웃었고 강아지와 원장님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져 너무 따뜻했다. 원장님 덕분에 길거리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귀엽다고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을 거란 확신을 덤으로 얻었다.


머리는 기장도 컬도 정말 맘에 들었다. 원장님 그런데 왜 미용실 이름을 가을로 택하셨어요? 아, 제 본명이 가을이거든요!



예약할 땐 의식하지 못했는데 아마 난 가을에게 머리를 부탁하고 싶었나 보다. 친절하고 조용하고 프로페셔널한 가을은 온화한 분위기로 날 이끌며 오래된 머리를 자르고 예쁘게 말아주었다. 가는 길 오랜만에 다시 그 호수를 걸었다. 연꽃은 이제 없지만 이파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가을 단풍이 든 나무들의 색깔은 고혹적이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 가을이네! 


가을 안녕. 드디어 내게 와줘서 고마워.



머리를 하고 이틀 후 내가 알던 기쁨이 돌아왔다. 10개월 만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다시 삶에 불이 켜졌다. 모든 게 변했다. 힘겨웠던 무채색의 여름을 이제 드디어 보내줄 수 있게 되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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