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 Jan 22. 2024

서른다섯,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시 사는 게 즐거워졌다. 다시 내일이 기대되고 삶이 좋아졌다.

 영혼,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혼에게 숨겨진 것, 미지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앎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네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대함을 펼치는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직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가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에 관한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 닐 도널드 월시, 43p



서른다섯 가을을 지나던 무렵,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멈추었던 시간은 다시 리드미컬하게 흐르기 시작했고 완전히 다른 기분과 감정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상태로 다른 차원에서 살게 되었다. 내 행동과 주변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양상 또한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날 가두고 있는 새장처럼 느껴졌던 집 구석구석이 좋아졌다. 샤워할 때 따뜻한 물줄기가 적시는 감각이 좋았고 모든 게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는 게 고마웠다. 부엌데기가 된 것처럼 의무감으로 준비하던 음식과 설거지를 즐기게 되었다. 뭘 먹으면 즐거울까 궁리하며 새로운 요리 메뉴를 연구했다. 싱크대와 조리도구들이 새삼 편리하게 느껴졌다. 빨래를 너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아, 행복해.’ 여름 Astin이 구매해 쌓아 둔 꼴도 보기 싫었던 캠핑용품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캠핑을 떠나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고 싶단 충동이 일었다.


더 이상 소파에 누워있을 시간이 없어졌다. 재미도 관심도 없는 영상을 무의미하게 재생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유튜브든 예능이든 드라마든 보고 싶은 것만 쏙쏙 골라 보면서 깔깔거리고 즐거워했다. 영화관에 가서 혼자 영화를 보고 감동하고 여운에 헤어 나오지 못해 영화 OST를 반복해서 들었다. 손이 아플 때까지 무감각하게 터치하던 게임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다시 명상하고 산책하는 날이 많아졌다. 스트레칭을 다시 시작했다. 새벽 4시, 줄을 서서 동네 수영 강습 강좌를 신청했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누군가와 만나서 대화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누군가 행복하고 기쁜 소식, 잘 된 소식을 들으면 덩달아 기뻤다. 보고 싶은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들렀고, 간직하고 싶은 책을 찾으면 신나서 구매했다.


신기하게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건강하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잔뜩 당겼다. 가끔 군것질하고 싶어지면 마음껏 먹었는데 예전만큼 많이 먹을 필요가 없었다. 어딘가로 놀러 갈 궁리를 거듭했고 매일 갖고 싶은 게 생겼다. 공연을 찾아보고 가볼 만한 전시회를 검색했다.


산책하러 나갔다.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새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다. 멍 때리고 거실에 앉아 하늘이 그려내는 온갖 빛과 색을 느끼며 황홀경에 빠졌다. 곳곳에 하늘을 날고 재잘거리는 새가 보였다. 전부 이곳에 그대로 있었다. 기쁨도 사랑도 감사도 곁에 있었다. 다시 사는 게 즐거워졌다. 다시 내일이 기대되고 삶이 좋아졌다. 머리가 맑아지고 명료했다.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 안에 사랑이 가득 채워졌다.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며칠 뒤, 절친 D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고장 나 있는 동안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그나마 D가 불러준 덕택에 바깥바람을 쐬었다. 그녀를 만나서 일상적인 주제 말고는 내면의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미덥지 않은 게 아니라 무슨 말을 누구에게 해도 소용없다고 느껴질 만큼 내가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D와 만나 그저 D의 일상을 듣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때는 웃을 수 있었다. 잠깐의 짧은 휴식을 뒤로한 채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뱉어냈다. 뭔가를 숨기고 있고 그녀에게 다 말할 수 없다는 미약한 죄책감이 들곤 했다.



사랑이 돌아오자마자 D를 만날 수 있다니! 너무 신이 났다. 여름 너무 더워서 엄두조차 못 냈던 한강을 산책하기로 했다. 그날 D와 망원에서 데이트를 했다. 햇살과 바람과 습도가 완벽했다. 점심으로 솥밥을 먹었는데 사람도 주문도 너무 밀려서 요청했던 반찬이 밥을 거의 다 먹은 후에야 리필되었다. 죄송한 표정으로 사과하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알바생을 보며 과거 우리의 미숙했던 모습이 떠올라 우리는 오히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큰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정겹고 따뜻한 망원 시장 골목을 걸어가며 D는 홀린 듯 각종 색깔의 채소를 구입했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거 있으면 좋겠다! 망원 좋다. 망원 예쁘다.


그날 내가 고른 파랗고 깊은 호수라는 이름을 지닌 커피집은 커피가 끝내주게 맛있었다. 와- 커피가 와인 같네. D가 나랑 먹어본 커피 중 제일 맛있다고 말하자 내가 내린 커피도 아닌데 괜스레 뿌듯함에 어깨가 올라갔다. 빛을 따라 걸으며 나무들 사이로 한강 공원을 걷다가 적당해 보이는 공터 계단에 앉았다. 나는 고해성사를 하듯이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동안 슬프거나 울적한 건 아니었는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고, 며칠 사이 기쁨과 사랑이 완전히 돌아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알게 된 게 너무 많아서 다 표현하고 말해주고 싶은데 잘 정리가 되지 않아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고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쏟아냈다.


D는 기뻐하며 힘든 줄 몰랐다고 지나간 나를 기억하며 안쓰러워했다. 나는 지나간 일이라 괜찮고 어차피 혼자 풀어야 할 숙제였으며 그 덕에 배울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입장과 관계없이 마치 엄마처럼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상상하면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거라고 말했다.




쿠바를 다녀온 스물여섯 겨울, 너무 힘에 겨워 세상 밖으로 동굴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때, D가 손을 내밀었다. D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그 손을 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취방에서 2달이 넘는 기간 동안 내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칩거했다. 그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 대가 없이 그 집을 내게 빌려주었다. 내겐 늘 고마운 기억밖에 없는 D는 가끔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 불렀다.


그 까닭을 정확히 몰랐는데 그날 공원에 앉아 이유를 듣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세상이 D에게 울지 말고 꾹 참고 견디라고 강해지라 채찍질하던 시기 유일하게 내가 울고 싶으면 울어도 괜찮다고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내 기억 속 고등학생 D는 언제나 밝고 명랑한 소녀였고 그 일에 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행이다. 그 시절 내가 D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다니! 참 다행이야. 처음으로 그 시절 자신이 자랑스럽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받았던 사랑을 주변에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있었구나. 그때도 그랬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D와 약 2년간 연락이 끊겼었다. 그러다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나기로 약속을 앞둔 전날 밤, 못 보던 사이에 우리가 변했을까 봐, 더 이상 서로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 무섭고 두려웠다. 나는 그녀에게 만나는 게 좀 무섭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무섭다는 답장을 받았다. 그래도 만나보자고 같이 용기를 냈다. 그렇게 다시 만난 D는 예전과 그대로였고 보자마자 어색한 기류 없이 편안하고 좋았다.


나는 D가 뭘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괜찮고, 좋은 일이 있으면 더 좋다.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그저 우리가 만나면 그 시간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D 앞에서는 애써 용기를 불러올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D를 사랑했고 D도 나를 사랑했다. 우리가 사랑한 시간은 쌓여서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허용해 주는 관계가 되었다.


-오늘 나눈 이야기, 책으로 써보는 게 어때? 잘 정리하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응! 그러고 싶어.


신기하게도 그날 D는 창조성에 관한 새로운 책을 읽는 모임에 참여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집으로 가는 길 D가 그날 찍은 내 사진을 보내줬다. 셀카로는 담을 수 없는, 그녀를 보고 환하게 기뻐서 웃는 자연스러운 표정의 내가 찍혀 있었다.  





기쁨과 사랑이 넘쳐흘러서 이 기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매일 마주한 행복한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졌다. 꿈도 야망도 성취도 감정도 그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이 사랑의 상태였다. 이 거대한 사랑으로 빛나는 필터가 내 안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것, 사랑의 렌즈를 낀 채 모든 걸 바라볼 수 있는 이 상태가 오래오래 지속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원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