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은 같지만, 고도가 달라.
길은 단지 하나이며, 여러 길 중 하나일 뿐이지만 다른 길들과는 다른 고유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삶에 산재한 인위적인 외로움은 사라질 것이다. 길은 각자 본연의 본성 안에서 드러난다.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고독한 길이다. 누구도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말해줄 수 없고, 누구도 그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없다.
-내면작업, 로버트 A. 존슨, 317p
Mi Cubano 8번 챕터의 제목은 ‘너는 나의 카르마’이다. 그건 단순한 비유에 불과했는데 정말로 Ale는 나의 카르마였다. 가장 깊숙이 가라앉았던 카르마를 꺼낼 수 있는 버튼이자 내 인생의 틀을 깨고 한 단계 도약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스텔라, 넌 왜 모든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알레, 너와 함께한다는 건, 너를 만나는 건 언제나 해묵은 분노를 꺼낸다는 걸 의미해. 네가 의도한 바도 아니고 너의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러나 너를 만나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이 미워지고 나를 비난하고 탓할 세상이 원망스럽고 나를 가두는 모든 압제와 규제에서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어 져. 나는 너를 만나면 내가 살던 세상을 다 파괴하고 싶어 져.
-내가 너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말이야?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너는 나를 사랑하게 하고 너와 함께 있을 땐 사랑을 느끼지만, 이상하게도 결과적으로 삶은 나를 그런 층위로 데려가고 말아.
어차피 미국에 가지 않을 거라면, 어차피 그와 함께하지 않을 거라면 어차피 한국에서 Astin과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삶을 살기로 결정할 것이라면 대체 왜 알레를 다시 만나야 했던 걸까? 그전에도 충분히 행복했고 잘 지내고 있었는데. 알레를 만난 후엔 알레를 아프게 하고 Astin을 고생시키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붕괴되고 망가져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는데.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일이었다면 대체 왜 내 삶에 이런 일이 벌어져야 했던 거지?
내가 인위적으로 계획한 일도 아니고, 영혼의 목소리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그건 기쁨과 사랑의 느낌에서 출발하고 선택한 일이었는데, 대체 왜?
10개월간 가장 나를 괴롭혔던,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애초부터 내 가정이 틀린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무 의미 없는 일도 일어나는 것인가? 쓸모없는 의미 부여에 지나지 않았나? 이제 운명을 믿을 수 없나? 그러나 지금은 그 질문에 대한 답할 수 있다.
아직 진정으로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받고 싶은 욕구를 이해하지도 버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레와 연이 닿지 않았다면, 서른셋 여름 포털이 열리고 독립을 하고, 다시 알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정도에서 만족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무의식에 내재한 불편을 순간 잊고 순간 모면하면서 내가 자유롭다 믿었을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슬프고 좌절하고 분노한다는 건 어떤 걸 원하고 있는데 충족되지 못해 불만이 생기고 불편하다는 의미야. 그럴 땐 스스로 묻자.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진짜 내가 원하는, 체험하고 싶은, 머무르고 싶은 그 느낌은 뭐지?
왜 알레를 만나 미국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 운명과 삶이 가리킨 길이라는 이유를 제외하고 말이야. 나는 어떤 느낌을 원했던 거지?
나는 자유로운 느낌을 원해. 뭐든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해볼 수 있는 자유로운 느낌, 내가 결혼했기 때문에 혹은 여자이기 때문에 또는 전에 해 본 적 없기 때문에 그건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좌절하고 분노하는 느낌이 아니라 거리낌 없이 그것을 선택하고 시도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그것이 존중받는 자유로운 느낌을 원해.
나는 모험하는 느낌을 원해. 예기치 못한 깜짝 서프라이즈 같은 일이나 인연이 생겨서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길 원해. 나는 새로운 자극을 받고 그 자극을 통해 내면과 자아상이 새로 발견되고 실현되길 원해. 그게 내가 생각하는 모험의 느낌이야.
그러니까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꼭 알레와 미국에서 함께 사는 삶에 국한되는 건 아닐 거야.
왜 그 커뮤니티를 나가야 할 때 슬프고 속상했어?
함께 있을 때 온전히 내가 받아들여지는 그 느낌이 참 행복했어. 그건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흔치 않은 경험이었어. 나를 이해해 주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하고 응원해 주는 그 느낌이 좋았어. 나 역시 그들의 꿈을 응원하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도 기뻤어. 사랑을 주고받는 그 느낌이 좋았어.
그럼 너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온전히 인정해 주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고 성장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고 싶은 거네. 이름이나 구성원이 꼭 같은 커뮤니티가 아니더라도 그런 느낌을 주는 커뮤니티라면 충분한 거네.
왜 엄마 아빠가 미워? 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같아?
과거 그들이 다투는 순간 내가 겪어야 했던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에 관해서는 다 해소되었어. 괜찮아. 그들이 일부러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그 덕분에 나를 찾고 한 차원 성장하기도 했어. 그 고통은 이미 승화되었어. 그 점에서는 나는 그들을 용서… 아니 용서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알았어.
그런데 왜 지금 다시 밉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내 운명을 따르지 못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내게 의무감을 심어주고 죄책감을 들게 만드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그들이 그걸 직접적으로 강제한 건 아니네. 나는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그들과 잘 지내고 싶어서 그걸 잃을까 두려워서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선택을 내 쪽에서 먼저 포기했던 거야. 진정 내가 하고 싶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찼다면 그들의 반응에 겁먹지 않고 도전해 보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거야. 결국에 행복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거니까.
그래서 무의식 속에서 엄마 아빠가 미웠어. 온전히 사랑만 하지 못했어. 그런데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었어. 그들이 나를 사랑해 주고 이미 많은 걸 해주고 가족에게 헌신적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 그래서 그들을 미워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아.
내가 원하는 건 엄마 아빠를 진심으로 온전하게 사랑하는 느낌이야. 내가 원하는 건 가족에게 인정받고 이해받는 느낌이고, 내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가족 구성원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받는 거야.
이제 알고 있다. 느낌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외부에서 사건이 생기고 그것을 지각하며 발생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이미 ‘지니고 있다’고 느끼는 것만을 외부로부터 반사하고 투영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실제 현실로 내가 원하는 느낌을 주는 사건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면의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에 그 느낌을 켜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느끼게 되면, 그 느낌이 영혼이 원하는 느낌이라면, 외부 사건도 서서히 내면과 동조되어 주파수가 맞는 일이 끌려오며 실제 현실로 체험된다.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경험했기 때문에 이 지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생겼다.
위빳사나 명상을 하고 나서도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던 상처의 부산물과 기쁨에 대한 의문들이 알레를 다시 만난 이후 선명하게 나타나 현실 과제로 주어졌다.
삶은 나선형 계단이다.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오르고 또 오른다. 내가 겪고 경험했던 사랑의 상태는 언어로 치환하면 거의 같은 말이 된다. 모두 같다. 그것을 잊고 있다가 다시 찾았을 때마다 나는 매번 깜짝 놀란다. 이미 과거의 내가 알고 있던 거네. 같은 말을 했고 같은 글을 썼잖아!
그렇지만 같은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빙빙 돌아서 한 계단 더 올라왔어. 그 과정에서 지혜가 깊어지고 사랑과 나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져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쓸데없는 일이 괜히 일어났던 게 아니야. 다시 돌아간 게 아니야. 나는 또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좀 더 가파른 각도의 나선형 계단을 힘겹게 올라 같은 방향에 도착해 있는 것이었어. 방향은 같지만, 고도가 달라.
이번에도 운명의 시나리오대로 삶이 이루어졌다. 운명은 날 배신한 적 없구나. 그리고 나 역시 운명을 배신하지 않았구나. 여전히 운명을 믿어도 되는구나. 나는 여전히 변함없이 운명론자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야. 이번에도 고마워, 나의 운명.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