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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10. 2024

조용하고 완전한 붕괴

모든 아카이브가 망가져 백지가 되어버렸다.

그게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어쨌든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인데, 만일 그걸 하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하잘 것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사자왕 형제의 모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222p





도서관에서 빌려 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좋은 에너지가 가득 담긴 긍정적인 책이었는데 한 장씩 읽어갈수록 마음에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걸 느꼈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할 때쯤 Astin이 귀가했다.


저녁으로 뭘 먹지 고민하는 도중에 왈칵 눈물이 흘렀다.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그는 말없이 족발을 주문했고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족발을 함께 먹으며 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했다.


내 영혼이 죽어버린 것만 같아. 영혼은 죽을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는데 왜 이런 거지?


내가 내린 선택이 못마땅해 모든 걸 망쳐버리고 싶어서 나를 벌주는 걸까? 홀로 되물었다. 아무 자극이 없어 더 괴로운 거 아닌지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그게 아니라 모든 자극을 막아 놓은 거라고. 지금 상태에서 좋은 게 생길 수 없어서 다 막아 둔 거라 대답했다. 


그가 작년에 찍은 핸드폰 속 사진을 내 앞에 앉아 하나씩 넘기는데 사진 속 내가 너무 행복해 보이고, 그때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라 ‘내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절로 의문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괴로워한 적 많았냐고, 진짜 괜찮아질 수 있는 거냐고 그에게 물었다. 당연히 괜찮아질 거라고 그는 나를 위로했다. 다만 나를 믿어야 한다고. 내가 나를 믿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참 울고 나니 속이 조금은 시원했다. 


10시 30분까지 깊이 잤다. 아주 긴 꿈을 꿨다. 꿈에서 괴로워하는 동생에게 그들은 극 S라서 N성향을 이해해 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언니와 눈물의 대화를 할래?’ 물었는데 막상 그녀는 괜찮아졌다. 다음 꿈에서 왕따인 나를 과보호해 주기 위해 듣기 좋지 않은 말은 일부러 내게 전하지 않는다는 그런 진담 섞인 농담을 했다. 

일어나서 무조건 억지로라도 감사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숙면을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다리가 멀쩡하고 오늘도 건강해서 감사합니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상을 시작했다. 오늘은 뭘 하면서 시간을 때우지 잡념이 들면 대신 자동으로 감사하자고 읊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냥 이 절망을 감사하자고. 이 우울과 절망과 부정적인 에너지에 감사하자고 인정하자고. 이유가 뭐가 되었든 원인이 무엇이든 이걸 그냥 치우고 떨쳐내려 하기 전 그저 온몸으로 안아 들고 감사하자고 내게 말했다.


나는 지금 우울하다. 절망하고 있고 이런 상태를 회피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자책감이 드는 데다가 자신을 깊숙이 혐오하고 있다. 다시, 앞에만 남기자. 나는 지금 우울하고 절망하는 중이다. 지금을 감사하자.(2023.03.24) 








눈물은 금세 멈췄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다른 이에게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정을 막 내린 참이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무너지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럴 수 있다. 


괴로워하는 자신을 비난하며 더 괴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활기 넘치고 생동하던 자신의 삶을 놓아버리고 무기력하고 방황하고 절망하는 자기 모습을 마주하는 건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이것마저 부정하거나 그걸 이유로 나 자신을 미워하면 걷잡을 수 없이 늪으로 빠져들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무엇이 되었든 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용서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인 선택을 해 놓고도 이 정도로 시름에 빠져 망가져 버린 나의 상태였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내 선택을 철회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덫에 빠진 기분이었다. 망했다. 작년에는 어떤 선택을 해도 행복할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 나는 어떤 선택을 해도 불행할 것만 같다.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결심도 선택도 할 수가 없어졌다.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할머니 폰 바꿔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모르고 계셔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헤어질 결심, 해준의 대사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나를 저버렸기 때문에 해준처럼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 선택이 내가 가장 나라고 믿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자아 관념 혹은 핵심 신념을 저버리고 부정해 버린 결정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완전히 부정당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감정적으로 무참히 실망했을 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지 않고 아무리 용서하려고 발버둥 쳐봐도 과거 내가 알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모르겠다. 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알던 나의 모든 아카이브가 망가져 백지가 되어버렸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나를 지지하던 커다란 기둥이 뽑혔다.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린 선택으로 말이다. 나는 누구였지? 나는 누구이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내가 내게 말해왔던 건 모두 거짓이었나? 착각이었나? 사실 이제껏 해온 모든 선택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던 거 아닐까?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나라고 믿었던, 운명론자에 대한 기억과 믿음은 너무 또렷했고 확고했기에 원래 운명론자가 아니었다고 과거를 부정하거나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알레에게 돌아가지 않고 남게 된 이 선택이 오히려 운명의 길을 따른 거라고 이제 와 거짓말을 하며 곡해할 수도 없었다. 



한 편으로는 그 선택이 예전처럼 그저 내가 망가지고 세상에 협박당해 두려워서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도망치는 선택지가 아니라는 선명한 이질감이 동시에 존재했다. 분명히 마음 깊숙한 곳에서 힘겹게 건져낸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해석이 불가능했다. 거대한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내린 선택은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진행되었다. 그저 반응한 게 아니라 자각이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영혼의 목소리를 따라 선택했는데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 괴리감을 설명해 낼 수 없었다.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다. 나를 위한 선택이 나를 완전히 붕괴시키다니.


나의 영혼은 죽어버렸어. 나의 사랑은 자취를 감췄어. 나의 세상은 회색 필터를 낀 듯 무채색의 암울한 세상이 되었어. 시간이 지나면 원래 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믿을 건 그것뿐이야. 




더 이상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게 싫었다. 뭐가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명상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내게 깊이 묻지 않았다. 책을 읽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활자가 읽히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해줄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그 무엇에도 흥미가 가지 않았다.


슬픈 건 아니었다. 우울한 것도 아니었다.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체념했다. 나를 포기했다.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다. 굳이 힘내자고 억지로 나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어차피 아무 소용이 없고 저항감만 생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지기 위해 억지로 행동을 취하거나 무언가를 바꿔보려 노력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이제까지 그러했듯이 관성에 따라 필라테스를 일주일에 두 번씩 가고 4주에 한 번씩 왁싱을 했다. 그게 유일한 일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땐 괜찮은 척하고 별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겉으론 꽤 멀쩡해 보였다. 그 외엔 집에만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굳이 다른 이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 모든 게 미웠다. 세상 모두가 미웠다. Astin이 미웠다. 엄마 아빠가 미웠다. 알레가 미웠다. 여름이 밉고 내 삶이 미웠다. 운명이 미웠다. 안락했던 집이 커다란 감옥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며 내 삶은 여기가 끝이고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살다 죽을 거란 생각에 익숙해졌다. 그동안 너무 잘난 척을 했다. 어차피 이렇게 살 거였으면 마음에 안 들어도 꾹 참고 어딘가 붙어 있기라도 했어야 돈이라도 벌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사회에 쓸모도 없고 증명할 게 하나 남지 않았다. 됐다. 이미 늦었다. 


과거 모험을 하고 싶었다. 알레와 함께하고 싶었다. 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엄마 아빠가 미웠다. 실은 내가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가 심어준 그들의 신념을 지키느라 나 역시 두려움에 전염되어 과거의 나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엄마 아빠 눈치를 보느라 딸 노릇을 하느라 효녀도 아니면서 어중간한 타협을 했었다. 엄마 아빠가 조금만 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면 내 삶은 더 나았을 거야. 나는 이렇게 붕괴되지 않았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정말 멋없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을 멈출 수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미워할 힘도 없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생각을 힘없이 펼쳐 널어놨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나와 삶을 완전히 체념했다. 아무리 슬프고 우울해도 그동안 나 자신을 붕괴하게 가만히 내버려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깊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스스로를 향한 사랑과 자부심이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최후의 안전지대가 되어 결국엔 나를 구출했다. 그러나 이번 선택으로 나는 더 이상 나를 믿을 수도, 좋아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도망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용하고 완전하게 맥없이 나는 붕괴되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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