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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05. 2024

베트남 여행은 33살의 내가 준 선물이었다

Judgment 심판

과거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내가 인정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판 카드는 수용과 용서에 관한 모든 것을 뜻한다. 결코 바뀔 수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결국은 더 크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카드는 이제 내가 가면을 벗고 진실하고 불완전해지길 원한다. 가장 어려운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에 내 회복력은 나를 더 성장시키고, 그로 인해 남은 흉터에는 미래로 향하는 지도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부활은 과거의 선택을 돌이켜보고 이 선택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왔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제 나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부활하기 직전의 상태이다.

 키워드: 부활, 수용, 목적, 각성, 재생
 -The Antique Tarot, 타로 리딩 가이드북, 클레어 굿차일드




결행하기 전 유예기간을 두고 기다린 데는 까닭이 있었다. 이듬해 봄 온 가족이 다 함께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환갑을 기념하여 한국의 겨울을 잠시 내려 두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나트랑 해변에 놀러 가기로 했다.



가족 여행은 서른 셋 여름, 스스로 준 선물이었다. 때마침 부모님 집에 놀러 간 날, 아빠 이름으로 적립된 상당량의 항공사 마일리지가 곧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순간 어디든 떠나자는 욕구가 일어났다. 아빠의 마일리지였기 때문에 욕심쟁이처럼 혼자 쓸 수는 없었고 가족과 함께 쓰기로 했다. 장난처럼 아빠와 함께 어디로 떠날까, 신난다, 슬렁슬렁 얘기하던 계획은 어느새 기정사실로 되고 말았다. 우리 모두 함께 나트랑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내가 총대를 매고 숙소를 예약하고 비행기를 예매했다. 이전 억지로 끌려갔던 가족 여행과 달리 너무나 신나고 활력이 넘쳤다. 이미 반갑게 맞이했던 기쁨을 이제 와 망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여행까지는 행복하게 다녀오자는 Astin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혼자 남으면 생각이 많아졌다. 가벼워지고 싶은데 마음속 달아 놓은 추가 흔들리면 어쩔 수 없이 무게가 느껴졌다.


가족 여행을 앞두고 생각이 더 많아졌다. 유예기간이 끝나면 되돌릴 수 없이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결행을 시작해야 했고, 가족들에게도 알려야 했다.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는 괴로워도 매일 매일이 행복하고 대부분의 시간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바가 끝나자마자 몸이 무거워졌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영양가 없이 TV를 보며 매일 시간을 죽였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의 나에게 미루었다. 급기야 가족 여행을 계획한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한 치 앞을 모르고 이렇게 일을 벌여 놓은 걸까?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과 마음을 억지로 달래며 식당 교통 등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찾았다. 조금도 즐겁지 않았고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이런 나의 기분과 상관없이 여행을 가는 날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여행 가기 마지막 전날 밤이 되어서야 억지로 짐을 쌌다.




나와 Astin은 가족들과 일정이 달랐다. 하루 일찍 나트랑에 도착하고 3일을 더 보낸 후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 가기가 정말 싫었다. 귀찮고 무기력한 자신을 바라보며 여행을 걱정했다. 택시에서 내려 리조트로 가는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몸과 마음은 환호성을 질렀다. 바다와 야자수, 하늘의 풍경에 들어선 순간, 너무 신나고 멋지다고! 이 여름 날씨가 끝내주게 화창해서 들뜨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5박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까지 내게 가족 여행이란 일반적인 여행과 달리 의무감에 가까웠다. 그런데 엄마, 아빠, 오빠, 언니, 조카, Astin과 함께한 그 여행은 모든 순간 너무너무 행복했고 못 견디게 소중했으며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즐거웠다. 여행이 좋았던 게 아니라 나트랑이 좋았던 게 아니라 모든 걱정과 스트레스를 내려 둔 채 가족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먹고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그 순간의 그 경험이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돌아가기 전날 밤, 거하게 저녁을 먹는 도중 술잔을 들고 아빠가 건배사를 멋들어지게 했다.


“우리 아들딸들은 여행하는 동안 신경 쓰느라 고생하고 피곤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빠 엄마는 정말로 즐겁고 너희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아빠는 더 바라는 게 없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고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말에 아빠의 사랑이 내 심장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사랑이 와닿아서 너무나 아름다워서 감동적인 동시에 곧 이 행복을 깨고 대못을 박을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니 가슴에 납덩이가 걸린 듯 따갑고 아팠다.





베트남 여행을 하면서 Astin과 둘이 남게 된 어느 오후, 한낮의 태양을 피해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 사장님이 부드러운 우유 거품으로 멋진 라떼 아트를 만들어 주셨는데 Astin이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 두다 탁자가 흔들리는 바람에 라떼 아트가 엉망이 되었다. 나는 서러워서 그에게 화를 내고 눈물을 흘렸다.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손님들이 놀라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이 재빨리 행주를 들고 와 잔과 테이블을 깨끗하게 닦아주셨다. 눈물을 멈추고 테이블이 흔들리지 않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


그 카페 벽면에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마치 교수형을 연상시키듯 밧줄에 목이 묶인 새가 가는널빤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배경은 역설적으로 밝은 노랑 빛이었다. 새는 슬퍼 보이지 않았고, 반항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새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했다. 새는 새장에서 탈출했으나 자신에게 묶인 밧줄까지 끊어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새는 자유롭지 않았다.



나의 운명을 어렴풋이 체감했던 것 같다. 그가 라떼를 망가뜨려서 운 게 아니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내게 가족이 너무 소중해서 그 세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는 걸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기에 눈물이 났다. 나는 그림 속 새였다. 아무도 나를 가두지 않았는데도 이미 밧줄에 묶여 체념하고 있었다. 나는 운명의 길로 나의 꿈을 향해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없었다. 그 밧줄을 묶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원망할 사람이 없다는 게 나를 더욱 서럽게 만들었다.




진정한 힘은 명상이나 기도를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 당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영혼의 자리, 게리 주커브, 166p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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