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Jan 08. 2024

카오스와 노트북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분명한 문제는 당신을 어떻게 믿느냐는 거죠
-빙고! 내가 널 돕는 건지 아닌지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그러니 날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네게 달린 거야

-벌써 알고 있다면 난 어떻게 선택을 하죠?
-넌 선택하러 온 게 아니야. 선택은 이미 했지. 선택을 한 이유를 알아야 해.

-왜 우릴 돕죠?
-우린 할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내 유일한 관심은 ‘미래’인데 함께하지 않으면 그 미래는 없다.

-매트릭스 2 리도디드, 오라클과 네오의 만남 중




내가 구축한 세계를 파괴하고 운명의 세계로 떠나겠다는 전언을 소울메이트 M에게 말한 그날, 담담한 척 나를 응원해 주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녀는 사실 많이 울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엔 내게 배신감이 들고 내가 밉기도 했다고. 그러나 다시 만난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힘들었어. 밉고 원망스럽고 그런데 결국 받아들임의 문제잖아. 시간은 별로 없고 그럴 시간조차 아까우니 받아들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 타인의 슬픔, 그건 어쩔 수 없어. 그 슬픔은 어차피 덜어질 수 없는 거야. 얼마나 오래 준비할 시간을 주든 뭘 하든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지. 거기엔 결국 차이는 없어.


그녀가 나와의 물리적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때 정작 나는 선택과 결정 사이, 다시 말해 혼돈의 허리케인 가운데 서 있었다. 일말의 확신이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내게 좋은 선택이, 나를 위한 선택이, 내가 원하는 선택이 무엇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다. 아는 게 하나도 없어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선택해야 했다. 


이 어지럽고 혼란한 마음속에서 대체 어떻게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거지? 




내가 따라온 그 길은 알레와 함께 하는 선택이 운명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쿠바 여행, 책의 탄생, 그 여름 포털이 열린 후 예기치 않은 독립, 열쇠를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 Astin과의 만남도 모두 알레를 다시 만나기 위한 운명적인 여정의 흐름처럼 여겨졌다. 그 길을 따르면 이제까지 내게 발생한 모든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알레, 미안해. 나 선택을 재고하고 있어. 잘 모르겠어.


-미안해할 거 없어, 스텔라. 네가 무슨 선택을 내리든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할 거야. 그리고 어떤 선택을 내려도 변함없이 널 사랑할 거고. 달라지는 건 없어. 다만 너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해. 다른 사람이 아닌 네 마음의 소리를 따라.



잠들 수 없이 너무 괴로운 새벽, 혼자 영화 노트북을 다시 보았다. 앨리의 모습이 내 상황과 이상하리만큼 완벽히 겹쳐 보였다. 예전엔 뭉클하게 넘기던 장면 하나하나가 내 가슴에 거대한 질문이 되어 꽂혀버렸다. 앨리는 마음을 다해 노아를 사랑했다. 가족의 반대라는 외부 요인으로 의해 어쩔 수 없이 노아와 헤어지고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운명처럼 론을 만난다. 앨리는 론을 사랑하게 되고 론은 가족들도 만족할 만한 완벽한 상대였다. 노아를 완전히 잊고 살던 앨리는 아주 우연히 신문 기사를 통해 노아의 소식을 듣게 된다. 론과의 결혼을 앞둔 채 앨리는 노아와 재회한다. 그리고 여전히 노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도 노아를 사랑함을 알게 된다. 앨리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노아와 함께하는 삶과 론과 함께하는 삶, 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노아는 그때 앨리에게 온마음을 다해 외쳤다.



-한 가지만 해줄래? 부탁이야. 네 삶을 그려 봐. 30년 후, 40년 후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남자가 떠오른다면 지금 가 버려. 이미 널 한 번 잃었으니 또 견뎌낼 수 있어. 네가 진정 원하는 거라면. 하지만 쉬운 길만 찾진 마.

-쉬운 길은 없어. 어쨌든 누군가는 다쳐.

-남들이 원하는 대로 맞출 생각은 이젠 그만둬. 나, 론, 부모님이 원하는 건 그만 생각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뭘 원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젠장,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앨리는 자신을 위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노아에게 돌아왔고 그들은 죽는 날까지 오래오래 사랑했다. 이 이야기는 실화에 바탕을 둔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영화 노트북은 17살 정신병원 입원 당시 함께 지냈던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보게 된 영화이다. 그 후로도 셀 수 없이 많이 보았다. 그녀는 몇 안 되는 진짜 사랑 이야기라고 노트북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난 앨리가 아니다. 앨리는 론과 약혼한 상태로 그와의 세계는 잠정적으로 예정된 상태였지만, 난 이미 Astin과 결혼해서 3년이 지난 현실에서 살고 있었다. 앨리는 단 한 번도 두려움이나 죄책감으로 노아와 헤어지기로 결정한 적 없으나(노아 쪽에서 단 한 번 그랬다) 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알레에 대한 미움으로 그를 떠나기로 선택했었다. 어느 쪽이지? 어느 쪽이 내 운명의 길이지?


여러 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괴로움 속 나 자신과 대화하고 대화하고 또다시 대화했다.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선택에 있어서 이렇게 우유부단한 적이 있었나? 모르겠단 말만 계속 맴돌았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거 알고 있는데도 도저히 모르겠어. 결정을 못 하겠어. 



한참 망설이다가 난생처음 고민을 안고 사주와 타로를 함께 봐주는 곳에 운세를 보러 갔다. 올해 내 사주는 마음이 충동에 시달리고 변화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란다. 현실적인 안정을 택해야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고민을 털어놓자, 그녀는 ‘가지 마. 가면 분명히 후회하고 되돌릴 수 없어 고통받을 것이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타로를 3장씩 두 번에 나누어 뽑았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 그대로 남는 선택에 올해 나의 소울 연도 카드인 ‘세계’ 카드가 있었다는 것만 선명히 기억한다. 그게 내가 받은 신호였다. 아마 냉정하게 떠나고 싶었다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곳에 타로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의식 속 나는 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확인받고 싶은 동시에 차마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이미 선택을 했다. 지금의 나라면 이 길에서 알레에게 향하는 선택지는 없었다. Astin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알레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Astin과 함께하기로 선택한 나는 알레에게 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게 겁이 나고 무섭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거센 저항과 커다란 미움의 에너지를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서 Astin을 위해서 나를 억누르고 참아야 한다는 그런 희생자의 역할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노아가 해준 말처럼, 알레의 당부처럼 오로지 나 하나만을 생각했다. 




나에게는 모험과 자유가 소중했다. 나의 꿈과 운명의 길을 따르는 게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걸 따르지 못하는 나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구축한 가족이란 세계와 가치도 못지않게 소중하고 중요했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어린 시절 받은 상처로 미리 벽을 둘러 내게 가족이 그다지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고 나를 속이며 방어기제를 만들고 있었다. 벽을 친 건 가족이 아니었다. 완전히 용서하지 않은 건 가족이 아니라 나였다. 다치는 게 두려웠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가족들이 주지 않아 실망하고 결국 그들을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운명을 사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나의 세계도 지키고 싶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롯이 나만 생각하고 나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결정을 내리고 몇 달이 지난 후 M과 대화하며 알게 되었다. 내가 내린 선택의 뿌리가 어디까지 이어져 내게 무슨 의미로 피어나야 했던 건지. 소녀 시절 내가 믿었던 안락한 가족의 세계가 붕괴되어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렸다. 물론 그 고통과 괴로움은 내게 큰 배움을 주고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녀에게 가했던 똑같은 괴로움을 소중한 사람들에게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설사 의도가 선하고 사랑과 운명을 위한 길이라고 해도 그것을 철회할 만큼 내겐 그 소녀를 위로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도 안다. 지금 나의 가족들은 내가 아니고 그 소녀도 아니라는 걸. 아마 어쩌면 내가 이 세계를 붕괴시켜도 처음엔 아프지만 생각보다 그들은 빨리 회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지도 모른다는 걸. 다시 웃으며 잘 지내다가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결국 내가 속한 가족의 세계도 다시 회복하고 다른 단계로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세계를 지켜내고 싶었다. 아… 내가 이런 말을 한다니. 진짜 나답지 않았다. 안정과 모험 중 하나를 택한 것도 아니고 현실의 압박이 두려워 숨은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내게도 소중하기에 지키고 싶었고 그 모든 경험을 한 지금의 나는 결국 이 길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힘겹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선택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현재 선택한 이유는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대체 왜 내게 벌어진 건지 삶에서 굳이 이 선택이 왜 일어나야만 했던 건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운명 속 선택의 의미와 이유를 찾으면 찾을수록 복잡한 미로에 갇혀 길을 잃었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이 무작위로 일어나는 일도 생긴다는 다른 이의 해석을 받아들이기엔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운명이란 깊은 늪에 빠져 손발이 결박당한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올 무력감을 체감하고 있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전 20화 베트남 여행은 33살의 내가 준 선물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