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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03. 2024

선택

DO YOU KNOW WHO YOU ARE?

You're waiting for a train. A train that will take you far away. You can't be sure where it will take you. But it doesn't matter - because we'll be together     

 -영화 인셉션(Inception, 2010)




혼돈의 다음 날이 밝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가 내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기다렸어. 이날이 오기를. 너도 알다시피 난 거짓말을 하는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 그게 누군가를 해칠 의도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지. 내 마음은 너를 만나고 단 한순간도 변한 적 없어.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 다만 너에게 말할 타이밍을 기다렸을 뿐이야. 너를 오랫동안 기다렸어.


-운명이든 뭐든 다 좋아. 그래, 네가 맞았어. 하지만 젠장, 너무 늦었다고, 너무 늦어 버렸다고!


-늦지 않았어.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얼마나 더 많은 증명이 필요해?


-생각할 시간을 줘. 너무 갑작스러워.


-좋아. 그렇지만 기억해.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겠지만, 너 자신에게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그날의 날씨도 변함없이 좋았다. 굳이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할리우드에 알레 덕분에 끌려갔다가 이런 문구가 적힌 옥외 간판을 보았다. 


‘DO YOU KNOW WHO YOU ARE?’





심란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은 괴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금 얼마 안 되는 알레와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감정이나 생각에 빠져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인간적 고뇌와 상관없이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기술을 알고 있고, 그것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함께 맥주를 나눠 마시고 볼링을 쳤다. 둘 다 엉망진창으로 형편없는 실력이었지만 서로를 놀리고 약 올리며 배가 찢어지게 웃었다. 바다에 가서 태양 빛이 쏟아지는 해변을 걸었다.


-스텔라, 인생은 짧아. 지금 우린 바다에 있으니, 고민은 잊고 바다를 즐겨.


맨발로 모래의 촉감을 느끼며 부서지는 파도를 오래오래 보았다. 고장 난 핸드폰이 해변에 버려져 있는 걸 발견한 알레는 그걸 주워 들고 나를 찍는 척 포즈를 취했다. 나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날은 9월 22일이었다. 알레와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더 주고 싶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 이제 네 결정을 말해줘야 해. 어떻게 할 거야?


-…돌아올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는 다른 무엇보다 내 삶과 운명을 사랑하니까.


알레와 잠정적으로 이별하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 머리는 맑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 미션은 너무 버겁다. 내가 가장 못하고,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일이 버거워진 이유가 이전 운명으로부터 겁쟁이처럼 도망쳤기 때문에 생긴 반사 작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운명을 거부하면 다음엔 더 커다란 반대급부를 지닌 운명의 시험이 내게 던져졌다. 그러니 이번엔 도망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설렘과 반가움으로 가득 차 나를 공항까지 데리러 온 Astin과 마주치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내가 너에게 잔인한 말을 내뱉어야 한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에게. 사랑만을 준 너에게.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하면 네가 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너와 알레 사이에서 누군가 한 명을 선택한 게 아니라는 것을.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걸. 네가 무언가를 잘못했거나 부족했거나 너와 함께 사는 삶이 싫어서 끝내는 게 아니라는 걸. 그저 나의 운명의 길을 따라가고 싶고. 오늘의 내가 새로 알게 된 부정할 수 없는 답이 알레와 함께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너와의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레가 더 매력적이거나 그와 함께 있는 게 더 즐거워서 택한 결정이 아니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동반자를 선택한다면 여전히 Astin과 함께 하고 싶었다. 내게 더 잘 맞는 짝은 그였다. 다만 마치 게임의 미션 발동 조건처럼 나 혼자서는 발생하지 않을 중요한 이벤트가 알레와 함께 있어야 생겨났다. 그 이벤트는 나와 알레 각자의 운명의 길을 가기 위해 꼭 필요하며, 무언가의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로맨스 같은 관점이 아니라 어쩌면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까웠다. 나의 운명을 따르고 꿈을 실현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 삶은 내게 알레와 함께하라 말했다. 



그 목소리를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면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모두 위선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운명론자였고, 나를 위하고 삶을 위한 일이라면 세상의 시선과 상관없이, 도덕이나 평판과 인정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인 잣대와 상관없이 진실하게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사람이라 믿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는 사랑으로 비롯된 나의 선택이 내 주변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거센 저항을 만들고 내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힘이 들었다.




그날 밤, 잠들 수 없던 나는 Astin을 깨워 모든 걸 털어놓았다. 


-미안해... 너와 헤어져야 할 것 같아.


내 말을 듣고 사랑과 전쟁에서 봤던 사람들처럼 그가 화가 나서 분노와 저주의 발언을 내게 쏟아냈다면 아마 모든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내 마음과 결정은 좀 더 쉽고 분명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한 그는 톤 하나 바뀌지 않고 평소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겠냐고 조용히 되물었다. 어차피 너는 자신이 억지로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는데. 너와 사는 게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다른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한 번도 그런 선택지는 고려해 본 적이 없어서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밤새 엉엉 운 건 헤어지자고 말한 내 쪽이었다. 


-그와 뭘 하고 싶은지 지금의 나는 몰라. 다만, 나는 꼭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만 알아. 미안해. 미안해…






그해 겨울 Astin과 헤어지기로 결정한 뒤로도 평소처럼 잘 지냈다. 여전히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가끔은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었다. 아주 가끔 바다를 보러 가고 공연을 보았다. 우리 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미국에 갔다 온 이후 돈을 벌기 위해 단기 알바를 시작했다. 대부분 깨어 있는 시간에는 출근길 버스 안에 앉아있거나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을 같이 먹기 시작했고 나는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쌌다. 



이따금 그가 희망을 품을까 봐 ‘나 여전히 너와 헤어질 마음이 굳건해.’라고 상기시켜 주곤 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가 답했다.


-있잖아. 너와 헤어져도 결혼반지를 간직해도 돼?


-마음대로 하시죠.


-난 이 반지가 정말 좋단 말이야. 이해 안 되겠지만 난 너와 함께 살든 같이 살지 않든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거니까. 그렇지만 넌 나를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괜찮아.

 

-난 가끔 네 사랑이 이해가 안 가. 나에겐 함께 있는 게 사랑이야.


-내 사랑은 영원해. 함께 하든 함께 있지 않든 그것으로 사랑이 사라지지 않아. 과거에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을 난 언제나 모두 사랑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소리를 나는 Astin이라서 모두 말해주었고 그는 들어주었다.




그 많은 날 동안 딱 한 번이었다. 그가 참기 힘들다는 듯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그의 말이 지워지지 않았다.


-왜 나랑 함께하는 삶은 너의 꿈이 멈춘다는 거야? 나와 함께 사는 건 용기도 도전도 없는 무료하고 지루한 삶이야? 


-그런 게 아니야. 너와 함께하기 싫어서 내린 선택이 아니야. 


-언젠가 네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있었어. 나는 너에게 안정이 되어주고 싶었어. 안정적인 삶의 기쁨을 알게 해주고 싶었어.



난 그가 그런 불안감을 지니고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이미 내게 그걸 모두 다 주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다시 알레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 모험을 떠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야. 너와 함께 사는 삶이 너무나 평화롭고 따뜻하고 안정적이어서 나는 처음으로 아이가 되어 모든 걸 내려놓고 내가 될 수 있었어. 네가 있어서 용기를 내어 내 진정한 모습을 찾아 그 모습 그대로 살 수 있었어. 너와 함께하는 매일이 행복했어. 


알레가 운명의 상대라고 말했지, 근데 너도 마찬가지야. 너와 나는 만나야 할 운명이었어. 지친 나를 치유하고 삶을 사랑하게 해 줄 운명이었지. 그런데 이제 헤어질 시간이 온 것 같아. 우리의 인연이 마무리될 시점이 온 것 같아. 미안해. 나를 미워해도 괜찮아. 너라면 괜찮아. 내게 그 많은 사랑을 주었던 너니까. 많은 아픔과 고통을 준다 해도 다 감내할 수 있어. 그럴 가치가 있어. 난 알아.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게 우리에게 결국 좋은 길이 되어줄 거야. 반드시 그럴 거야. 


우리가 나눈 마음과 사랑은 진짜니까. 난 그 사랑이 너무 좋고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나는 네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영원히 너를 사랑할 거야.




매일 산책길을 걸으며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한국의 가을과 겨울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무거운 압박 속에서도 삶에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Astin과 보내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가을과 겨울도 평소처럼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다. 나는 사랑이 끝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그 사랑을 미워하거나 억지로 끝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랑이 끝난다는 아쉬움으로 빛을 잃어가는 사랑을 억지로 되살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사랑이 있다면 그건 내게 단지 사랑만을 의미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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