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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an 01. 2024

산타바바라의 마법과 열쇠

The beginning of Fate

서른넷이 된 가을 7년 만에 다시 알레를 만났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자, 캘리포니아의 건조하고 맑고 따뜻한 날씨가 나를 맞이했다. 순식간에 여름 한복판으로 이동한 것만 같았다. 그를 만난 첫날 그가 무척 반갑고 우리의 만남이 신기했지만, 시차 적응할 새 없이 바삐 움직인 몸은 지쳐버렸고, 몇 가지 불운한 선택으로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딱히 그에게 바라던 건 없었기에 사사로운 불운은 실망스럽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알레와 똑 닮은 것 같은 하루여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튿날, 파워 P, 즉흥의 의인화 알레는 나와 만난 후 어디를 갈지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은 너무 멀고, 사람 많은 건 내가 좋아하지 않고, 갑자기 자기 친구가 사는 도시에 가보자고 말했다. 내게 친구를 소개해 주고, 그 도시를 보면 좋을 것 같다고 단번에 결정했다. 


그렇게 알레와 만난 둘째 날, 얼떨결에 산타바바라를 갔다. 우리는 산타바바라의 골목과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난 나만의 비밀스러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두 눈을 크게 떴다. 알레를 만나면 열쇠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스텔라가 되고 운명을 만나는 열쇠 말이다. 




한눈에 산타바바라에 반해버렸다. 미국에도 이런 도시가 있구나.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푸르고 청명했고 낮고 동글동글한 구름이 일렬로 둥둥 떠갔다. 도시는 깨끗하고 고요한 동시에 생기가 넘쳤다. 예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저마다 색깔로 무장한 유니크한 상점이 골목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몰을 구경하다가 배가 고파졌다. 나는 점심으로 초밥과 롤을 먹자고 제안했다. 알레는 마음에 들었는지 한 접시를 더 추가했다. 점원은 굉장히 친절했으며, 그녀의 머리띠가 귀엽다고 말하자 그녀는 나의 멜빵과 알레의 셔츠가 쿨하다고 답했다. 햇빛이 강렬해지자 알레가 중간에 놓여있던 파라솔을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파라솔을 공유하던 옆자리에 앉은 여자분의 머리 위로 그늘 한 점 없이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졌다. 신경이 조금 쓰여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자, 그녀는 밝게 웃으며 자기는 햇빛을 좋아하니 개의치 말라고 미소 지었다.


천천히 몰을 걸으며 구경하다가 길 한복판에 놓여 있는 콩주머니 던지기 게임을 발견했다. 여지없이 알레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콩주머니를 구멍 안에 던지기 위해 씨름했다. 나도 알레도 소리만 요란하고 제대로 골인시키지 못했다. 


시장이 열리는 날인가보다. 길거리엔 가판대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과일, 채소, 잼, 수공예품, 다양한 색의 아기자기한 상품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다들 들떠 보인다. 계속 걸었다. 




터널을 보았다. 그 순간 자전거 한 대가 터널을 통과해 내 쪽으로 달려왔다. 햇볕이 꿈결처럼 반짝이고 심장이 기쁨으로 떠올랐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아름답고 기묘하다. 새로운 세계에 접어든 기분이 들었다. 


마치 쿠바로 돌아간 것처럼 알레가 먼저 걷고 나는 뒤따라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와 달라진 건 찍고 싶은 만큼 무엇이든 사진을 맘껏 찍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알레가 내 가방을 메고 걷다 멈춰서 날 기다린다. 말다툼 대신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침묵과 애정이 우리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항구가 있는 바다였다. 바다로 가는 길목에는 돌고래 두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이 조각된 분수를 지나야 했다. 나무 건널목을 건너자 한 편엔 산이 있었고 맞은편엔 요트가 가득 정박해 있었다. 끊임없이 바다에 윤슬이 반짝였다. 바람에 내내 머리가 날렸다. 몇 걸음 가다 멈춰 사진을 찍고 얼마 못 가 다시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항구엔 여러 상점이 있었다. 조개 모양의 기념품점, 모비딕에 나오는 고래가 그려진 벽화가 있는 술집, 또 그곳과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손금을 봐주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항구 끝 쪽 바닥 한가운데 뜬금없이 나침반이 그려져 있었다. 나침반 중앙에 서자 속이 약간 울렁거렸다. 마치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정하라 말하는 것 같았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 쿠바에서 탔던 자전거 택시를 똑 닮은 탈 것이 가게 앞에 있었다. 우린 반가움에 포효하며 자전거에 올라타 장난을 쳤다. 


-스텔라,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우리가 쿠바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아.


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나 보다.


좀 더 걷다가 골동품 가게 통창에서 엔틱한 디자인의 새장이 진열되어 있는 걸 봤다. 새장의 소재는 나무로 고풍스러운 궁전 모양이었으며 새장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새는 안에 없었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한동안 뚫어져라 그 새장에 시선을 빼앗겼다.




산타바바라에 오자마자 성당처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을 하나 발견했다. 저녁 무렵 나는 거기 가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성당이 아니라 관공서였다. 이미 문은 닫혀 있었다. 앞에는 광장 같은 잔디밭이 있었고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신나게 공놀이하며 뛰어놀았다. 조금 추웠지만, 알레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산타바바라 이 도시가 너무 좋다고, 오늘 너무 행복했다고. 


-나 예지몽이나 자각몽을 자주 꿔. 그리고 반복해서 꾸는 꿈이 하나 있어. 그 꿈을 꾸면 행복해.


그때 서야 알게 되었다. 이전에 알레가 말해준 꿈은 원하고 소망할 때 쓰는 꿈이 아니라 밤에 잠을 자며 꿨던 꿈이었다. 예전부터 너는, 얼마 전에 알게 된 꿈 작업을 자연스럽게 하며 살고 있었구나.




저녁에는 알레 친구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바비큐와 나를 배려한 잡곡밥과 호박을 곁들인 정갈하고 건강한 한 끼였다. 거기에 스파클링 와인 한잔을 권하는 데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다정하며 지적인 사람이었고, 멋진 저녁을 선물해 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알레에게 해준 모든 일에 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네가 없었다면 나는 알레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 정말 너에게 감사해.


-저야말로 당신에게 감사해요. 알레가 미국에서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앞으로도 알레를 잘 부탁해요.


그 집에서 나와 마당에서 하늘을 보자 별이 가득했다. 별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하루면 충분해. 미국에 온 이유가 다시 알레를 만난 의미가 충분해.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난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행복감에 젖어 모든 긴장이 풀어진 나는 숙소로 데려다주는 알레의 차에서 잠이 들었다. 차가 멈추고 인사를 하고 내리려고 하자 알레가 말했다.


-여기 우리 집이야. 잠깐 기다려. 오늘 밤에 너랑 함께 있을 거야.


그 순간 잠이 확 깼다. 아... 나 진짜 너무 행복했는데. 






그날 새벽부터 아침이 될 때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을 너무도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걸 알기 위해 훈련하고 단련해 온 나날이었다. 나는 내 몸과 영혼이 전하는 메시지를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날 때와 비교하면 표면적인 정보가 아래 심층부에 내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건져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 영혼이 보내는 아주 작은 속삭임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보 멍청이였다. 어쩐지 열쇠를 아무리 찾으려고 노력해도 그날 마법 같은 하루를 보냈음에도 끝내 열쇠를 찾지 못했다. 답은 간단했다. 그가 열쇠였다. 알레가 나의 열쇠였다. 



나의 몸과 마음은 마치 알레를 위해 맞춤 제작된 정교한 기계 같았다. 내게 운명의 상대가 있다면 그건 부정할 수 없이 알레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영화 라라랜드의 미아와 세바스찬처럼, 노트북의 노아와 앨리처럼. 내가 어떤 삶을 산다 해도 상관없이 나의 운명은 알레를 내 삶에 데려왔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건 결핍에서 나온 욕구도 아니고 파괴적이고 무의식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객기도 아니었다. 차분하고 고요한 기다림 속 내 깊은 근원, 내면에 내가 영혼이라 부르는 순수하고 지혜로운 참자아의 대답은 ‘알레가 너의 운명이야.’였다. 


나를 속일 순 없었다. 너무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알레를 만난 게 운명적인 일이란 건 과거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때 난 운명의 상대가 단 하나이거나 구체적으로 특정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과거 알레와 이별할 무렵 이것을 지금처럼 나의 몸과 영혼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더라면 분명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로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때 내가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의 내가 되었기 때문에, 알레와 헤어지고 나를 찾고 글을 쓰고 Astin과 함께한 삶 덕분에 지금의 나는 알레가 운명이라는 사실을 선명히 알게 되었다. 이 무슨 고약한 역설이란 말인가?


그 생각을 인정하고 나자, 약 3일간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나의 몸은 무장 해제되어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숙면을 취했다. 




운명의 시작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져버렸어.

다시 길 위를 걷는 상상을 했지.

한순간에 모든 걸 알게 되었고 그건 운명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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