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가 숲이 되려면

<향모를 땋으며> 속 생태계 이야기(1)

by 초록노동자

생태 가치를 전하는 초록노동자입니다. 20년 차 식물연구원이 보는 환경, 자연, 식물에 대한 시선과 경험을 공유합니다.






봄비가 내립니다. 계획했던 변산반도국립공원 산행을 취소했어요. 며칠 전 봄의 절기인 우수가 지나고, 숲 속 계곡의 얼음이 녹아 물이 되었는지, 아직은 추운 날씨인데 변산바람꽃은 잘 나왔는지 확인하고 인사를 건네려고 했는데요. 잠깐 내리고 말 봄비라면 조금 맞을 것을 감수하고 출발했을 텐데요. 하루 종일 내린다는 예보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슬오슬한 날씨에 봄비까지 더해진다면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조건이니까요.

책과 노트와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왔어요. 군산에는 제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습니다. 회현커피 Part 2. 문 여는 시간인 10시에 맞춰서 오려고 했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다 보니 조금 늦었어요. 제가 즐겨 앉던 자리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두 분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어요. 오늘은 뒷마당이 내다보이는 문 앞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 창을 열고 메모해 둔 드립커피의 이름을 얘기했어요. "콜롬비아 게이샤 체리 밀크셰이크 한 잔 주세요. 마시고 갈게요."


비 오는 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네요. 조용한 음악 소리와 마당의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립니다. 방금 내려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어요. 아주 조금 마셨을 뿐인데, 입 안에 꽃향기가 가득합니다. 이 커피의 맛을 알게 된 후로 주말만 되면 오픈런을 합니다. 입 안에 꽃향기를 머금은 채로 태백산맥 3권의 문장을 필사하고, 모닝페이지 187일 차를 기록했습니다. 2월의 독서와 글쓰기를 정산하고, 이제 브런치에 연재글을 써보려고 노트북을 열었어요. 빗소리가 글쓰기를 반갑게 재촉하는 아침입니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던 오늘 아침,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향모를 땋으며>(로빈 윌 키머러 지음, 에이도스출판사, 2021)의 4장을 읽었어요. '오늘의 브런치 글감은 이거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부분을 읽었어요. 오늘은 바위가 어떻게 숲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지의류가 겁 없이 바위에 뿌리를 내려 보금자리로 삼았다. 물론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지의류는 뿌리가 없으니까. 흙이 없을 때는 뿌리가 없는 게 유리하다. 지의류는 뿌리뿐 아니라 잎과 꽃도 없는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다. 바늘구멍만 한 작은 틈새에 깃든 먼지만 한 번식체(암수의 구별이 없거나 암수 개체가 필요 없이 홀로 만들어진 생식 세포가 새로운 개체의 증식 단위가 될 수 있는 균체)에서 출발하여 지의류는 알몸으로 화강암에 자리 잡았다. 이 미세 지형은 바람을 막아주고 오목한 부분을 만들어서 비가 내린 뒤에 물이 미세한 웅덩이에 고일 수 있도록 했다.(p.394)


지의류는 식물이 아니다. 지의류는 하나가 아니라 균류와 조류 둘이다. (중략) 조류는 빛과 공기를 당으로 바꾸는 귀중한 연금술인 광합성을 선물로 가져온다. 조류는 독립영양생물 (중략) 습기가 있어야만 광합성을 할 수 있는 데 반해 몸이 마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은 없다. 균류는 종속영양생물, 즉 '다른 생물을 먹는 생물'이다. 스스로 식량을 만들 수 없어 남이 모아들인 탄소를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균류는 물질을 분해하여 무기질을 끄집어내는 솜씨는 훌륭하지만 당을 만들지는 못한다. (p.396~397)




야외 조사를 다니다 보면 큰 바위나 돌을 자주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에서도 바위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나 도로 옆에 조경용으로 놓여 있는 바위(조경석)들은 자연에서 도시로 가져다 놓은 것이에요. 그 바위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요? 자연을 헤치고 바위를 꺼내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도시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바위를 볼 때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자연에 있든 도시에 있든, 바위에는 어김없이 지의류가 자라고 있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얼굴에 피는 버짐처럼.


KakaoTalk_20260302_123435829.jpg 경남 고성 상족암군립공원 바닷가에 있는 바위의 지의류



식물의 발달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이 되는데요. 흙이 아예 없는 곳에서의 발달과 흙이 있는 곳에서의 발달입니다. 흙이 아예 없는 곳은 바위나 화산지대를, 흙이 있는 곳은 산불이나 산사태가 일어난 지역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흙이 있는 곳은 그곳을 선호하는 식물의 씨앗이 어느새 날아와 살곤 하는데요. 흙이 아예 없는 곳에서는 식물이 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러한 곳에는 지의류가 먼저 들어와 바위의 환경을 바꾸고, 바뀐 환경에 이끼가 들어와 환경을 바꾸면, 그제야 식물의 씨앗이 날아와 살 수 있게 됩니다. <일반생태학> 책에 나오는 식물의 발달, 즉 '일차천이(primary succession)'의 과정입니다.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흙이 만들어지고 식물이 살 수 있게 되기까지 수백에서 수천 년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어요. 인간이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없으므로 조사와 실험에 근거한 정확한 기간을 제시할 수가 없겠지요. 그저 아주, 아주 오래 걸린다는 추측밖에는요. 우리는 현재를 관찰합니다. 지의류가 살고 있는 바위도 있고, 이끼가 살고 있는 바위도 있어요. 지의류가 바꿔 놓은 환경에 이끼가 살기 시작하면 식물에게는 좀 더 나은 환경이 됩니다. 이끼는 폭신하고 두터워 식물이 뿌리내린 후 물을 빨아들이고 영양소까지 얻을 수 있으니까요. 거칠고 메마른 바위의 표면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제주의 곶자왈에 가본 적이 있나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용암 지대의 큰 돌과 바위 위에 식물이 자라 숲을 이루는 곳이지요. 이렇게 숲이 되기까지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원래는 식물이 전혀 없는 앙상한 바위지대였을 텐데요. 수백에서 수천 년이 지나 지금의 숲을 이루었습니다. 굳건한 뿌리들이 저마다 커다란 바위를 감싸 안고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은 우리 인간들에게 다양한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하고요. 두텁게 쌓인 시간의 노력을 단 한 순간에 허물어버리는 훼손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면, 쉽게 인간에게 되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KakaoTalk_20260302_123427167.jpg 지의류와 식물이 함께 살고 있는 풍경(상족암군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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