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나를 달래주는 한 잔

[9화] 모주 한 잔

by fiely

도착해서 내린 기차역에서는

나가는 출구가 크게 두 군데가 있었다.

가장 왼쪽이냐 가장 오른쪽이냐...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이 있는 시간 대였던 것 같고,

누구 하나 붙잡고 물어보기에 아직 나는 방황하는 여행자 마인드를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가장 오른쪽 출구로 나가자

"IKSAN"이라는 영문이 보였던 것 같고

다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와 아빠가 함께 역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내가 제대로 골라서 나왔네" 싶었다.


가려고 생각해 둔 콩나물국밥집은 20분여 걸어가야 했다.

보통 그 정도는 산책을 하니까, 도시 분위기도 익힐 겸 걷기로 했다.


쭉뻗은 길 그러나 낮은 건물-

그리고 골목골목 시장이 있지만 왠지 사람이 쓱 빠져버린

베드타운의 한 낮 같은 분위기에서 20분을 걷다 보니,

초보여행자는 어디로 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반가워서 말을 걸고 싶을 정도였다.


( 나중에 지도로 살펴보니

반대편 출구가 중심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프랜차이즈 카페나 음식점이 그쪽이 즐비해 있더라... )


20분여 주머니에 주먹 쥔 손을 감추고,

산책을 빙자한 비장한 걸음으로 콩나물 국밥집에 도착했다.

오후 한 시 정도 되어 도착한지라, 마침 내가 앉을자리도 있었고 약간 한가한 틈이 된 거 같아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며 작게 외쳤다.

"콩나물국밥하나 하고 모주 한잔 주세요"


술은 일 년 만이다.

(대부분이 모주가 무슨 술이냐고 할 것 같다.)

그 일을 겪은 후로 내가 술김에 무슨 일을 할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소주 한잔에도 취해서, 회식 때 늘 사람들의 취한 모습을 바라만 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모주 한잔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도, 쭉뻗은 길만 잘 걸어오면 되기도 하거니와,

왠지 새로운 곳에서 알 수 없는 용기 같은 게 생겼다.


술 까짓 거 취해도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먼저 나온 모주는 막걸리보다 색이 진해서 살짝 겁이 났다.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 단숨에 한 모금 넘기는데, 이게 웬걸-

콩나물 국밥이 나오기도 전에 한잔을 다 마셔버렸다.

계피향이 진하게 퍼지면서 씁쓸할때쯤 설탕을 들이부은 듯 달콤함이 느껴지고 우유 한잔을 마시는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국밥은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콩나물국밥과는 약간 다른듯했지만,

모주의 달콤함과 딱 맞는 짝이었던 것 같다.

한잔 더 시킬까 말까 고민했지만,

나에게 모주 두 잔은 여행자가 아니라 실연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꾹 눌렀다.


아마 십 분도 안 걸렸을 것 같다.

모주 한잔과 국밥 한 그릇 뚝딱하고,

얼떨떨하게 취한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여행자에서 만취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덕분에, 원래 가려던 박물관은 가지도 못한 채

20여분 걸었던 그 길을 똑같이 되돌아서 익산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익산역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대합실에 한 시간 정도 앉아서 취기를 달랜 후,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다시 올라탔다.


지금 돌이켜보니 대책도 가성비도 아무것도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의 감각을 곤두세우며 무언가를 해야 하는 과정이었고,

새로운 곳에서 나도 모르게 모주 한잔 걸칠 용기도 내보았다.

비록 럭키라고 생각한 길이 남들이 보기에 잘못된 길이었지만,

뭐 어떠리- 나만 즐거웠으면 됐다.


어찌 됐든, 모주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모주 한잔, 책 한 권을 위해 떠난 여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올 한 해 모주 한잔으로 지난 씁쓸함을 다 달큼하게 마셔버리고, 나만의 감각을 다져가며 나를 위해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먼 훗날, 언럭키라고 생각한 일들이 사실을 럭키라 깨닫는 날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내 마음속에 모주 한 잔을 항상 기억하기로 했다.


모주 또 마시러 가야하나-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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