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였다. TV 뉴스를 보던 아버지가 화면 속 흑인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조롱했다. 나는 순식간에 통곡했다. 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딸을 영문도 모른 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를 언제나 사랑하고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토록 무식한 혐오를 품고 있다는 것에, 그 혐오를 꺼내보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절망했다. 나의 아버지가 그저 그런 한국의 중년 남성이라는 게 못 견디게 시시했다...라고 쓰다가 멈춘다. 그냥 그가 틀린 것인데 한국 중년 남성을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해서.
신형철의 평론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제목이 정확하게 요약하듯이, 나는 자라면서 정확하게 사랑하는 법을 골몰해왔다. 이미 사랑해버린 대상이라도 정면에서 바라보려고 했다. 심장을 꺼내서 건넨 것처럼 내 사랑의 박동과 온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부쳤다. 문제는 미워하는 일도 그만큼이나 정확해야 한다는 것. 어렵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요새 부쩍 자주 한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 하는 그런 넌더리야. (생략)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정세랑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이토록 정확한 경멸이 나온다. 아주 개별적인 경멸. 너의 구체적인 나쁜 선택. 거기에 일격을 가해야 한다. 아니면 내 기력만 소진할 뿐이니까.
정확하게 미움 받는 일도 마찬가지다. 나의 행위에 대한 개별적인 미움을 나 또는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미움으로 곡해하지 않는 일. 아마도 여성 직장인에게 이건 평생의 숙제다. 가령 나는 회사 부서 10여명 중 혼자 여자다. 우연이 아니라 이 부서에 여자를 발령낸 게 몇 년 만이라고 했다. 그러니 초장부터 나는 곤두서 있었다. '내가 성과를 못 내면 당분간 여자는 이 부서에 못 오겠구나' 하는 노파심과 동시에 '여자애 보내놨더니 어쩌구 하면 다 죽여버릴 거야' 하는 분심이 들었다. 실수했다가 지적을 받으면 두 마음이 또 동시에 솟구쳤다. 이 얼마나 소모적인 일이냐고요. 나 혼자, 몰래 지쳤다. 이 부서에 온 뒤로 처음 새치가 났다. 그래도 1년 넘게 그럭저럭 버텼고(장하다!) 여전히 나는 이 부서에 나홀로 여자 팀원이지만(징하다!) 이제는 온몸에 돋아난 가시를 좀 수그리고 지내려고 한다.
과녁을 벗어난 경멸을 우습게 여기고 내 경멸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일. 화가 많은 직장인은 월요일 아침 괜히 화가 나서 새삼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