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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Feb 19. 2024

밤이 깊었습니다, 엄마는 고개를 드세요

'엄마 카르텔'을 아시나요

'카르텔'이란 말이 밈처럼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좀 시들하다만. 대통령실에서 뭐만 하면 카르텔이라고 부르면서 시작된 거 같은데, 아무튼 사교육 카르텔, 금융 카르텔, 패거리 카르텔… 우리 시대에 척결해야 할 카르텔은 다채롭다. 영화 '웡카'에서 초콜릿 카르텔이란 말이 나왔을 때 아마 한국 관객들은 두 배로 웃었을 것이다.


임신 사실을 회사에 알린 뒤, 나는 존재조차 모르던 '엄마 카르텔'에 가입됐다. 평소에는 가정생활을 드러내지 않던(워킹맘들은 자신이 아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투입하고 있는지 회사에서는 언급하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다. 여성 직장인에게 요구되는 프로페셔널이란 그런 것일까?) 워킹맘 동지 언니들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조용히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몇 개월이야? 밥 사줄게."


언니들이 내민 도움의 손길은 달콤했다. 아기띠, 육아책, 아기 옷, 아기비데와 욕조 같은 육아용품부터 임산부 옷까지. 아낌 없이 나눠줬다. 마치 과거의 자신에게 가르쳐주듯 절박함을 담아 실전 임신·출산·육아팁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정부지원 산후관리사 서비스를 아직도 신청 안 했다고? 왜? 나 늦게 알아봤다가 후기 좋은 관리사들 못 잡아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빨리 신청해! 지금 해!"


업무 과정에서도 알게 모르게(이 부분이 중요하다) 배려를 해줬다. 입덧과 졸음에 고통받던 시기, 나는 여직원휴게실에 가지 못 했다. 도리어 임신 전에는 숙취에 시달리는 다음날 꿀물보다 더 달콤한 휴식을 취하던 곳인데.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는데도 괜히 임신했다고 업무에 소홀한 걸로 보일까 걱정했다. 지치지도 않는 노예근성이다. 담배 피우러 수시로 자리를 비워온 사람도 있건만. 내가 지금 성실하지 않으면 '역시 여자애들은 뽑아놓으면, 쯧' 하는 지긋지긋한 빌미를 제공할 거라는 자의식과잉 우려까지 보태졌다. (내가 이런 우려를 하기까지는 직장 내에서 보고 들은 바가 있겠지) 이런 내가 지쳐보이면 초콜릿이나 디카페인 차를 건네고 은근슬쩍 업무를 조절해 자기 몫으로 나눠가진 건, 모두 언니들이었다.


이토록 조심스러운 카르텔이라니. 사실 회사 내 워킹맘들이 은밀하게 나누는 대화는 카르텔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대단한 이권보다는 눈물겨운 생존투쟁에 가깝다. "주말에 회사 근처 OOO 전시회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이건 평일에 아이와 소통이 적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워킹맘들이 주말 휴식을 반납하고 구상한 공동육아 프로그램이고, "육아휴직 1년 다 쓸 거지?" 이건 네게 주어진 권리를 온전히 누리는 것만으로도 다음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길이 된다는 걸 잊지 말라는 당부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고, 직장 동료는 친구가 아니다.' '직장 사람들에게는 직장 얘기만 하자.' 이렇게 다짐하던 나는 엄마 카르텔에 얼마간 기대어 쉬었다.


임신을 해보니 경력자와 비경력자의 격차가 이만큼 극심한 분야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아저씨들은 언니들을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 없이 분발하셔야겠다. 예컨대 업무로 만났던 모 기관의 50대 남성 어른과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 입덧이 너무 심해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개인적인 사정을 내비치는 걸 꺼리는 편이라 가뜩이나 조심스러웠는데, 그는 "당일에 약속을 취소하면 어떡하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임신 사실도 털어놨는데. 그 뒤로 그가 대외적으로 말하던 저출생이 어쩌고 하는 아름다운 말들이 진정성 있게 들릴 리 없지.


이건 성별이나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평생 겪을 없는 불편이라 지라도 공동체 일원이라면 기꺼이 상상력을 발휘해 상대의 불편을 배려할 줄 아는 능력. 우리는 그것을 '지능'이라 부를 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그다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회사 선배가 불러내 밥을 사줬다. 그러면서, 너무 겁내지 말라고, 특히 워킹맘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나를 다독였다. 과거의 그녀에게 필요했던 말이라는 듯이. 그녀는 자신의 멘탈관리법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간단히 말해 '미혼 동기들과 경쟁하려 스스로에게 가혹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그들이 직장 밖에서 갖지 못하는 행복들을 누리고 있으니. 후배인 내가 보기엔 그녀는 자신의 선배와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능력자'에 '워커홀릭'이건만… 휴직과 복직을 거치고 '나는 왜 쟤들처럼 일에 시간을 투입할 수 없을까' 자괴감을 겪은 시간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또 아이가 주는 위안에 대해 말했다. 너무 아름다운 순간들을 들려줘서 듣던 내 눈에 주책스럽게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외쳤다. "임산부는 잘 운단 말이에요, 선배!" 조그만 피자집에서 그와 나는 서로의 체면을 위해 잠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이어가야 했다.


말 그대로 눈물 나는 시스터후드의 재발견. 아기가 내게 준 또 다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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