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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Feb 15. 2024

다시 태어나도 결혼할 거냐고 남편이 물었다

대답 대신 제로웨이스트샵에 갔다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남편은 우리가 아름다운 순간을 보낼 때 가끔 내게 묻는다. 경이로운 풍경을 함께 봤을 때, 본인이 만든 요리가 아무래도 작품 같을 때, 같이 본 공연의 여운을 즐기다가 문득. '역시 나랑 결혼하길 잘했지? 다음 생에도 결혼할 만하지?' 하는 눈망울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나는 답한다. "나… 다시 안 태어나면 안 될까…?"


남편과 다시 사는 거야 좋다. 또 태어나고 싶지가 않아서 문제지. 기본적으로 나는 '생즉고', 삶은 고통이라 믿는 사람이다. 물론 인생에는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이왕 태어난 거 잘 살고도 싶다. 그러나 산다는 건 암튼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작 30대.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지금껏 내가 나를 거둬먹이고 돌보고 번듯하게 사회에 내놓고 때로 달래주는 일은 퍽 피로했다. 오죽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 경지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윤회의 고리를 끊는 열반이겠냐고요. 인생, 한 번이면 충분하다. 남편아.


집요한 쿼카, 행복한 쿼카인 그는 포기를 모른다. 다시 묻는다. "꼭 다시 태어나야 하면?" "인간 말고 다른 걸로 태어날 수 있어도 싫어?" 그러면 나는 마지 못해 답하곤 했다. "나는… 돌멩이로 태어날래…" 뭐든 생의 주기를 반복하기 싫다는 얘기인데 남편은 "그래? 그럼 내가 윗돌로 태어날게! 다시 만나!" 하고 만족한다. 대단한 쿼카다.


그랬던 내가 다시 태어나 다시 자라는 중이다. 아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기억할 수 없었던 잉태의 순간부터 목격하는 중이다. 삶을 리플레이하듯이. 언젠가 회사 동기 A는 또 다른 동기가 아빠가 되자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신비할 거야. 삶을 처음부터 다시 살아보는 거잖아!" 했었는데, 걔는 애도 없는 애가 이 신비를 어떻게 알았지?


매일매일, 다음 생을 생각한다. 근심한다. 물티슈를 죄책감없이 써제끼고 매주 월요일 아파트 재활용분리수거 일마다 배달음식 묻은 1회용기를 은근슬쩍 섞어 버리고 '국민연금 고갈되면 이민가야 하나?' 따위의 생각이나 하던 내가. 이제는 국민연금 개혁안 뉴스를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보험요율 인상을 지나치게 미뤄왔다고 생각한다). 제주에선 벌써 매화가 피었다는데, 올해 벚꽃개화 시기를 검색하면서 꽃놀이 계획뿐만이 아니라 기후변화의 정도를 가늠한다.

급기야 오늘은 제로웨이스트샵에 다녀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좀 유난인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요즘 배달음식을 줄이는 대신 장을 봐서 집에서 밥을 해먹는 일이 늘었는데, 남은 채소를 냉장고에 넣을 때마다 비닐이나 랩을 쓰게 되는 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단단한 밀폐용기는 냉장고 공간 활용하기 비효율적이고.


검색 끝에 재사용 실리콘 백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걸 인터넷 배송으로 사는 건 좀 시트콤 같았다. 그래서 집 근처 제로웨이스트샵을 찾다가, 블로그 후기를 찾은 가게 두 곳이 몽땅 폐업했다는 엄혹한 자영업의 현실을 확인하고(2022년까지만 해도 방문 후기가 있는데…) 이태원에 약속이 있어 나온 김에 '노노샵'에 들렀다.


노노샵은 포장 없이 리필용 세제, 먹거리 등을 파는 제로웨이스트샵이자 비건 카페. '비정상회담'에 나왔던 줄리안이 운영하는 걸로도 유명하다. 무식하니 용감하게도 용기 없이 와서, 그러니까 쪼렙이라 리필제품을 담아갈 통을 안 들고 와서 세제나 과자는 못 사고 실리콘 백만 하나 집어가지고 왔다. 다음엔 용기 내서 가야지.


https://naver.me/G0lsJ3Dq


초미세먼지가 심한 날, 세상은 아무래도 망해가고 있는 거 같다고 한탄하자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생각을 했어?" 나는 멍청하게도 "그러게… 그러니까 이제 너랑 내가 천천히 망하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했다. 뭔가 거꾸로 됐다. 세상을 긍정해서 아이를 낳는 게 아니라, 아이가 태어날 테니 이제 세상이 나아져야 한다. 지구는 덜 아프고, 사람들은 좀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돼야 한다. 거꾸로지만,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마지막 장면에는 돌멩이로 변해버린 딸 조이(스테파니 수)과 엄마 에블린(양자경)가 나온다. 에블린은 조이를 구하기 위해 멀티버스(다중우주)를 오가며 자신이 삶에서 해온 크고 작은 선택들이 사실은 수많은 가능성을 저버리는 일이었고, 지금의 자신이 "최악의 에블린"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최악의 에블린"이 세상을 구한다. 좌절과 허무에 빠져 돌멩이가 되기를 택한 조이의 곁을 지키는 것도 기어이 돌이 된 "최악의 에블린"이다.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하다면, 혹은 세상에 수없이 다시 태어난 내가 있다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나는 '최악의 나'일까?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내게 더 많은 도전 혹은 평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거나 해외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할 때 조금 덜 망설일 것이다. 예측가능한 범위의 안정을 누리며 일상을 꾸려갔을 것이다. 세상이 성에 차지 않는 아이가 훗날 "그러게 왜 나를 낳았어!"라고 따질지도 모른다(아직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괘씸해지는 상상이지만…). 아이의 안녕을 바라며 마음을 졸이는 날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생을 사는 건 예측불가능했던 범위의 도전과 평안이기도 하다. "세상은 망해버린 거 같아!"에서 그치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 더 잘 살아야 해." 다짐하는 종류의 삶이란 건.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최선의 나'다.

'노노샵'에 가는 길에 들른 북카페에서 아드리앵 파를랑주의 <봄은 또 오고>라는 그림책을 읽었다. 책에는 여러 봄날이 나온다. 한 남자아이가 자라 딸을 낳고 키우는 시간들이 쌓인다.


"세 살의 봄, 나는 바다에서 첫걸음마를 떼지. 파도 거품 속 가지런히 놓인 나의 두 발. 내가 간직한 첫 기억이야." '나'의 첫 기억으로 시작한 책은 "서른둘의 봄, 바다에서 딸에게 첫걸음마를 가르쳐." 딸의 첫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생은 이어지겠지. 내가 전혀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멋진 순간들이 네게 찾아오겠지. 오늘은 비가 내렸고, 라디오에선 DJ가 "이걸 봄비라고 해야 하나요, 겨울비라고 해야 하나요?" 물었다. 그렇게 다시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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