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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Feb 12. 2024

어서와, 입덧은 처음이지?

사람 냄새 나는 거? 딱 싫다

"생리 그거, 좀 참았다가 화장실 가서 싸면 되는 거 아니야?"


대학 시절 들은 말 중 '경악 베스트 5위' 안에 드는 문장이었다. 친구가 애인의 상식 수준에 놀랐다며 전해준 말로, 그 애인이라는 남자는 월경혈이 마치 소변처럼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는  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소위 'SKY대' 학생이었는데. 제 아무리 상식과 시험용 지식은 다를 수 있다지만… 그의 문장을 전해들은 친구들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다가 대한민국 성교육의 빈약함에 대해 한참을 통탄했다.


태어나 처음 입덧을 겪으며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애를 떠올렸다. 남 욕할 때가 아니었다. 얘, 나도 암껏도 몰랐다…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입덧은 이런 식이다. 어여쁘고 가녀린 임산부가 식탁 앞에 앉는다. "욱…" 갑작스러운 헛구역질에 그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란다. "너, 혹시?"


지금 와서 보면 일단 임산부가 그토록 가녀리고 어여쁘다는 것부터 공감하기 힘들다! 입덧은 보통 4~8주에 시작된다. 입덧을 겪을 때쯤면 그녀는 이미 빈뇨와 미열 같은 증상으로 밤잠을 설치는 좀비 상태일 텐데. 뭐 그거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 내 경우 가장 큰 차이는 '음식 앞에서만 구역질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러다가 구토 엔딩. 구토 흔적을 지우려 양치를 하면 다시 구토. 나는 양치할 때마다 입덧이 심해지는 양치덧에 당첨됐다.


무엇보다 나와 내 주변 임산부들이 가장 심한 입덧을 호소하는 장소는 식탁 앞이 아니었다. 끝판왕은 지하철이었다. 그렇다. 냉혹한 생업의 현실. 임신해도 출근해야 한다. 늦지 않게. 자차가 있더라도 서울에서는 출퇴근 시간대 교통체증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지하철은 피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지하철은 임산부에게 지옥 오브 지옥철이었다. 진동과 (임신 전에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온갖 사람 냄새, 그들의 옷과 몸에 배어있는 음식 냄새 같은 것들이 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칭찬으로 쓰였던 "사람 새 난다"는 말이 이제는 욕설과 다름 없었다. 나는 매일 마스크를 쓴 채 제발 지하철 한가운데에서 토하지 않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그러니 등에 뒷 사람의 토사물을 바른 채 출근하 싶지 않다면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놓아 달라…


사실 요즘은 '입덧에 대해 몰랐다'고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인스타툰이며 브런치, 블로그, 유튜브 등에 임신과 출산에 대한 생생한 체험기가 차고 넘친다. 그치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엄마도 어머님도 입덧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 그럼 이건 어디서 온 입덧인가요?


K드라마의 입덧 장면에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딱 하나 있다. 입덧은 기습이라는 것. 어느 밤, 맥도날드 치즈버거가 미친 듯이 당겼다. 치즈버거는 남편의 최애 버거로, 나는 태어나 한 번도 내 돈 주고 사먹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마라탕을 먹어치운 뒤였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사와야지. 드라이브스루로 남편과 내 몫의 치즈버거 두 개를 사왔다. 그 두 개를 주방에 선 채 와구와구 먹어치우는 나는 흡사 한 마리의 배고픈 짐승이었다. 남편은 내 곁에 선 채 어여쁘고 가녀리게 말했다. "안 뺏어먹을게, 다 먹어, 천천히 먹어…"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입덧이. 나는 한 달 넘게 일체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됐다. 길을 걷다가 치킨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했다. 삼겹살 회식을 하고 집에 들어온 남편을 욕실로 밀어넣었다. 돌이켜보니 그날 밤의 치즈버거는 뱃속의 아기가 허락한 최후의 만찬이었다.


입덧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입덧을 가장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표현은 '숙취가 안 끝나요' 정도일 것이다.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나는 최악의 숙취 상태로 출퇴근을 하고 근무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거나 집안일을 해야 한다.


억지로 밥도 먹어야 한다. 숙취가 심하면 까짓거 굶으면 그만이지만 뱃속 아기의 건강을 일임당한 처지에 마음대로 굶을 수도 없다. 숙취가 안 끝나는데 끼니가 자꾸 돌아와요. 입덧 기간 그나마 내가 넘길 수 있는 건 냉면, 콩나물국밥, 똠얌꿍, 마라탕 같은 해장음식들이었다. 토덧, 양치덧, 먹덧… 임산부가 100명이면 100가지 입덧 증상이 있다던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데 나의 경우 새콤한 맛이 도움이 됐다.


요즘 나는 누군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카카오톡으로 포지타노 레몬캔디(aka 입덧캔디)를 선물하면서 그에게 당부한다. 먹어둬, 뭐든지… 실컷… 그건 언젠가 언니들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역시 언니들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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