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보면 줄거리는 요상하다. '진짜 공주'와 결혼하고 싶은 왕자가 한 명 있었다. 벼락부자나 품위 없는 공주가 아닌, 진짜 공주와. 그는 진짜 공주를 찾으려 전국을 돌아다니다 실패하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왔다. 비바람이 불던 어느 밤, 허름한 행색의 여자가 왕자의 성문을 두드렸다. "저는 이웃나라 공주인데, 비가 그칠 때까지만 머물 수 있을까요?" 왕자는 그녀를 손님용 침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녀가 진짜 공주인지 확인하기 위해 침대에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요 수십장을 깔고 그 아래에 완두콩 한 알을 넣어뒀다. 다음날 아침, 잠은 잘 잤냐고 묻자 공주는 울상을 지으며 답한다. "침대가 불편해서 한숨도 자지 못 했어요." 왕자는 그녀와 결혼한다.
도대체 무슨 교훈이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이봐요, 안데르센 선생… '올드머니룩'이 유행하는 요즘에 와서 보면, 자수성가도 아니고 태어나 고생 한 번 안 해본 금수저를 선망하는 물질만능주의의 극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란 애는 왜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는지…
아무튼 어린 나는 설명할 수 없이 몸이 찌뿌둥하거나 초기 감기 기운이 있어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을 때 엄마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걸 좋아했다. "오늘은 완두콩 공주가 된 기분이야. 완두콩 한 알만큼 불편해!"
임신을 하고서 나는 완연한 완두콩 공주가 됐다. 아기…라고 부르기도 멋쩍은 세포는 아직 1cm도 되지 않는다는데. 속이 부글거리고 수시로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비워내야 하며 그러느라 밤에 3~4번씩 깨어대서 다음날 회사에서 좀비 상태가 됐다. (그런데 아직 회사에 밝히지 않아 티도 못 낸다.) 근육통에 몸살 기운이 느껴지지만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원인 모를 두드러기와 가려움증도 시작됐다. 배가 수시로 당기고 아픈데 이게 빨간불인지 초록불인지 초보운전자인 나는 모르고, 의사에게 설명해봤자 아픔의 정도를 블루투스로 전송할 수 없으니 설명에 한계가 있다.
참으로 강력한 세입자가 아닐 수 없었다. 집주인도 절절매는. 최근에 산부인과 의사 오지의가 쓴 <출산의 배신>이라는 멋진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9개월짜리 세입자의 엄청나게 요란한 리모델링". 임산부의 가슴을 때리는 표현이다. 아직 완두콩 크기도 안 되는 9개월짜리 세입자가 내 몸의 작동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었다.
이 세입자의 리모델링 중 가장 황당한 건 임신 초기에도 숨이 찬다는 사실이었다. '임신해서 숨이 찬다'는 건 배가 남산만하게 불러오는 막달에나 겪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 겉보기엔 아무런 티도 안 나는 임신 초기에도 매일 뛰어다니던 출퇴근길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가 숨이 턱턱 막혔다. 중간에 멈춰서서 천장을 바라보며 쉬어가야 할 정도로.
의사에게 물어보니 원래 그렇단다. 임신하면 참 많은 몸의 변화가 생기고 그걸 말할 때마다 의사의 답변은 한결같다. "임신하면 원래 그런 증상이 생겨요. 병원에서 딱히 조치해드릴 수 있는 건 없어요." 60대 엄마가 "병원만 가면 '늙으면 원래 그래요'라고 하니까 참 허망하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숨이 차는 건 체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져서일 수도 있고, 혈류량이 증가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아무튼 천천히 움직이는 수밖에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찾아 헤매야 엘리베이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임신 전에는 몰랐다. 피곤해도 적당히 둘러보다가 그냥 계단으로 가버리면 되니까.
지하철 엘리베이터에 대해 또 하나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노인, 짐가방이 무거운 외국인 여행객, 유아차에 탄 아기와 그의 부모, 휠체어를 탄 장애인, 휠체어를 타지는 않지만 걸음이 불편한 장애인… 그들이 모두 비좁고 드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장애인 단체의 불법 시위로 인해 열차가 무정차 통과할 예정입니다." "특정 장애인 단체의 불법 시위로 인해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이런 지하철 안내방송이 예전과는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장애인 단체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매일 출퇴근길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을 비롯한 장애인 단체들이 수십년간 온갖 비난과 손해배상 소송을 감수하고 이동권 시위를 벌여온 덕분에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점차 늘어났다.
육아/출산용품 준비 리스트를 적으면서 우리 부부가 첫 번째로 떠올린 건 '승용차'였다. 지금까지는 주로 둘이서 움직이니까 투도어(two-door) 차도 문제가 없었는데, 신생아를 데리고 병원이라도 가려면 뒷자리에 카시트가 장착된 큰 차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차가 없다면? 그런 선택지는 떠올리기 힘들었다. 택시에는 카시트를 장착하기 힘들고, 대중교통은… "저상버스가 드물고(언제 올 지 알 수 없고)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연결돼있지 않다"는 전장연의 절규가 떠올랐다. 얼마 전 읽었던 신문 칼럼도 떠올랐다.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유아차였다."로 시작되는. 버스에는 휠체어와 유아차 전용 자리도 마련돼있다는. (아래에 전문 링크)
'차 없으면 애 못 낳는 나라'와 '장애인이 자립하기 힘든 나라'는 실은 같은 나라였던 것이다. 이걸 깨닫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뒤늦게 임산부는 전장연에 아주 적은 후원금을 송금했다.
"정상인가요?" "정상입니다." 산부인과 병원을 드나들며 나는 이전보다 '정상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됐다. 기형아 검사라는 관문은 '그래서 정상이 아니면 어쩔 건데?' 하고 내게 물었다. 나의 문제가 돼야만 타인의 슬픔을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인간의 비극이지만, 완두콩보다도 작은 아이가 벌써부터 내 공감의 영역을 리모델링하고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나를 매일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