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만 하지 못하는 한국인답게 T vs F 농담에 끼어들어볼까 한다. 나의 MBTI는 ENTJ. 이렇게 말하면 MBTI 좀 아는 사람들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ENTJ는 비호감, 밥맛 없음, 지만 잘난 줄 아는, 논리과 인과관계에 집착하는 MBTI 유형의 대명사로 통하는 듯하다. 나는 서둘러 덧붙인다. "잘 안 맞는 거 같기는 한데… 사실 MBTI라는 게 좀 허황된 면도 있잖아요?" 그러면 상대는 말한다. "그거 ENTJ라서 그래요." 아…하.
T도 임신은 한다. T 임산부로서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왜요?" 질문을 참기 힘들다는 것이다. "망고 알러지가 없었는데 갑자기 생겼어요. 왜 이런 거예요?" "입덧은 대체 왜 하는 걸까?" "기린은 태어나자마자 걷는데 인간은 왜 홀로 서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왜, 왜, 대체 왜요. 여기저기 물어봤자 임신 증상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임신하면 원래 그래요"로 귀결됐다. 아시다시피 그런 결론은 T 임산부를 결코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유를 알면 뭐가 좀 나아져요?"라는 핀잔에 더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도 뾰족한 답이 없다는 사실까지. T 임산부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임신 초기, 입덧으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에 '입덧 원인' '입덧 진화 이유' 이런 단어들을 검색하고 있자면 나도 참 징하다 싶었다. 분만이 다가오는 최근에는 '왜 유독 인간만 출산이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인간은 왜 이렇게 덜 큰 채 태어나는가'에 꽂혀 있다(나는 요즘 인간이 자기 똥을 닦을 수 있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문득문득 아득해지곤 한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가설을 찾아냈다.
직립보행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이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다윈은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봤고, 과일 따기 위해서라거나 이동에 따른 진화라는 주장 등이 여전히 경합 중이다. 아무튼 인간은 두 발로 걷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일정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출산이다. 직립 보행을 위해 인간의 골반은 좌우로 넓어지고 앞뒤로는 좁아진 구조를 띄게 됐다. 즉, 몸속 아기를 세상에 내놓기 점점 어려운 형태로 변해갔다.
아기가 나올 문이 점점 좁아진다면 아기가 더 작아져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면 아기가 살아남을 수 없다. 진화는 그런 방향으로 이뤄졌다. 산도를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시기, 그러니까 뱃속에서 최대한 성장할 수 있는 시점까지 아기는 엄마의 몸에서 버티다가 엄마의 몸을 헤집으며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 설명은 T 임산부의 갈증을 해결해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위안과 깨달음도 준다. 문제는 태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두뇌가 미완성인 채로 태어난다. 앞서 말했듯 직립보행하는 엄마의 좁은 산도를 통과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아기가 뱃속에 있는 동안 조기교육(?)에 좀 소홀했다고 해서 뇌 발달, 잠재력에 비관하긴 이르다. 신생아기에도 뇌는 자란다. 인간은 계속 자란다! 심지어 엄마도 일생 배워나겠지. 아, 이건 위안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