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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Mar 04. 2024

모두가 임산부를 울릴 준비가 돼있다

오늘 아침도 울었다

아침부터 또 질질 짰다. 또, 라고 한 건 임신한 뒤에 완연한 울보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기집을 초음파로 확인 후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며 의사 앞에서 울어버린 걸 시작으로, 틈만 나면 운다. 호르몬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사회생활 N년간 견고하게 쌓아뒀던 마음의 둑에 구멍이 뚫려버린 기분이다.


그렇다고 맨날 울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황당한 측면이 있다.) 어느 밤, 입덧을 달래려 남편과 집 앞 산책을 하다가 고백했다. "나 요즘 정말 행복해. 나는 회의적이고 의심이 많아서 순도 100%의 행복을 믿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우리 셋이 안녕하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마음 가득 행복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펑펑 울면서 일어났다. "어떡해! 내가 아이를 가졌다니 너무 무서워!" 월경도 멈췄는데 월경전증후군(PMS) 뺨치는 감정기복이다.


오늘 아침에 운 건 책을 읽어서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책이라서. 며칠 전 아는 언니가 임신 축하 선물로 웹툰작가 난다의 에세이집 <거의 정반대의 행복>을 줬다. 난다 작가가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으며 느낀 행복감과 당혹감을 쓰고 그린 책이다. 어떤 내용은 내가 이미 지나온 시기라서, 익히 아는 감정과 순간을 너무 적확하게 표현해서, 어떤 내용은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라서, 모르는데도 공감하게끔 만들어서, 자주 웃고 울며 읽었다.


내 눈물 둑을 무너뜨린 대목은 카메라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 쓰면서 또 울 거 같다… 난다 작가는 아이의 그 어떤 순간도 놓치기 싫어 자꾸 카메라를 들게 되는데, 두 돌이 넘어가니 아이가 직접 카메라로 세상을 찍기 시작했다고. "어느새 카메라 메모리카드를 확인해 시호가 남긴 흔적들을 보는 일은 나에게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꼭 생쥐가 찍은 사진처럼, 낯설어 보이는 집 구석구석의 삐뚤빼뚤한 풍경들에 시호의 작은 몸집이 떠올라 웃기고 애틋해지곤 한다." 나도 웃기고 애틋해하다가 그 다음 문장에서 기어이 눈물이 터졌다. 


"언젠가 시호의 사진에 수평이 생기면 조금은 슬플 테지."


<거의 정반대의 행복> 중에서.


가뜩이나 눈물이 후한 임산부인데, 세상은 언제든 임산부를 울릴 준비가 돼있는 듯하다. 며칠 전에는 퇴사한 회사 선배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그가 퇴사할 때 혼자 눈물을 훔쳤을 정도로 선망하던 선배였다. (음, 원래 울보였나.) 그는 피자를 썰어 먹다가 "OO이가 엄마라니, 아이는 참 좋겠다. 정말 행운이다. 태어나보니 OO를 엄마로 맞이할 수 있다니." 하고 말했다. 마치 내일의 날씨를 말하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그 무덤덤한 말투에 담긴 다정한 응원과 극찬에 눈물이 고여서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못 하고 한참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L선배가 아기 옷 물려주면서 직접 적어준 육아용품 준비 리스트. 선배도 6개월 아기를 키우는 중이라 한창 힘들었을 때인데.


물론 임신성 울보를 가장 자주 울리는 건 임신 그 자체다. 아기는 내 몸의 일부인 주제에 수시로 나를 겁에 질리게 하고 눈물을 뽑아내는 중이다. "임신 기간 가장 힘든 게 뭐야?"라고 친구들이 물을 때, 나는 "불확실성. 한 치 앞을 모르겠는데 그 한 치 앞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게 나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돌아버리게 해."라고 답하곤 한다.


불확실성이 가장 컸던 건 '입덧 이후 태동 전' 단계였다. 입덧의 유일한 순기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뱃속의 아기가 날마다 커가고 있다는 막연한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실은 '입덧 증상이 유지된다고 해서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고 확신할 만한 의학적 근거는 없다.) 입덧이 지나간 15주 무렵, 뱃속의 아기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 아무것도 없다는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첫 태동을 느낀 후에는 바쁜 하루를 지낸 뒤 '어? 오늘 태동 한 번도 없었나?' 깨닫는 순간이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아직 아기가 작으니 태동이 약하거나 내가 미처 태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간 걸 텐데도. 남편과 호캉스를 떠난 날에도 그런 기분을 느껴서 혼자 호텔 화장실에서 울었다. '아직 아기는 청력이 발달할 때가 아니다'며 태담을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던 나는 배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기야, 건강해야 해. 나 이미 너를 좋아하게 된 거 같단 말이야…"


울보를 노리는 세력(?)들도 너무나 많다. 며칠 전 만삭촬영이란 걸 했다. 보통 산후조리원을 계약하면 연계 사진 스튜디오를 통해 '만삭촬영+신생아 사진+50일 사진' 패키지를 무료로 제공한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지. 무료 패키지는 미끼 상품으로, 수백만 원짜리 백일+돌 사진 패키지를 계약하게 만들기 위한 엄청난 전략이 숨어 있다. 이른바 '산모를 울려라!' 작전.


고객 감동은 모든 마케팅의 목표라지만, 이 경우는 조금 더 치밀하다. 아기 엄마가 촬영을 위한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남편에게 편지를 쓰도록 시킨다. 아기를 위한 편지 한 장, 산모를 위한 편지 한 장. 그리고 만삭 촬영을 하는 동안 골방의 직원들이 실시간으로 사진을 받아 화려한 보정과 함께 아빠의 손글씨 편지를 스캔해 감동 영상을 만들어놓는다. 촬영을 마친 뒤에는 사진 확인을 하라며 아기 부모를 앉혀 놓고 그 영상을 틀어준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임산부의 마음이 한없이 말랑해진 순간, 상담 실장이 들어와 백일+돌 사진 패키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걸 맘카페를 통해 예습하고 갔건만 기어이 눈물 둑은 터졌다. 우는 나를 보며 남편 마음마저 덩달아 약해져 계약 조건을 한참 상담하기까지 했다. 미리 서로를 다잡기로 약속해둔 덕에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끝내 20만 원짜리 원본 사진 파일은 사버렸다… 배경음악으로 김동률의 감사를 트는 건 반칙 아니냐고요… 나중에 찾아보니 스튜디오들이 김동률의 노래를 애용하는 듯하다. 엄청난 전술이다.


화려한 스튜디오 사진을 굳이 계약하지 않은 건 내가 내 사진 앨범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사진이 담긴 앨범을 보면 나는 줄곧 울고 있다. (역시 원래 울보였나 보다.) 짓궂은 사촌 오빠들이 나를 울리는 걸 유독 재밌어했고, 더 짓궂은 어른들은 그걸 사진으로 찍는 걸 즐겼기 때문이다. 계절과 배경, 날짜, 옷이 바뀔 뿐 얼굴이 벌게지도록 오열하고 있는 나는 그대로인 사진들이 빼곡하다. 사진 끄트머리에는 배 잡고 웃는 사촌 오빠들이 빼곡하고… 몇 장 더 넘겨보면 그 오빠들의 옷을 좀 더 자란 내가 입고 있기도 하다. 빌려입은 드레스를 입고 정좌하고 있는 사진들보다 이런 것들이 내겐 더 소중하다.


그런 앨범을 자주 펼쳐 보면서도 나로 인해 어린 엄마가 울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임신한 뒤에야 "너를 갖고 임신중독증으로 힘들어 자주 울었는데…" 하는 얘기를 들려줬다. 하긴, 임신중독증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임신 전에 얘기해줘 봤자 전혀 못 알아들었겠지. 배가 불러오는 나를 보면서 "아기가 발로 차서 갈비뼈가 엄청 아플 텐데. 갈비뼈가 정말 부서질 것만 같을 건데." 자주 안타까워 하는 걸 보니 그 시절의 엄마는 갈비뼈 통증으로 고생을 했었나 보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꼭 "그치만 태동이 활발하다는 건 행복한 거야. 아기가 건강하다는 신호니까." 하고 덧붙인다. 나뿐만 아니라 과거의 엄마를 다독이는 것 같은 말투다. 갈비뼈 부근에서 태동을 느낀 날, 나는 지금의 내 또래인 그 시절의 엄마를 생각하며 조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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