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도 출산을 하나요?
대한민국 출산파업 와중에 열일하는 도비
몇 년 전 결혼식을 준비하며 본가를 뒤집어 놓았다. 사진을 찾느라. 결혼이란 가족의 탄생이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고, 결혼식장도 그에 맞춰 꾸밀 요량이었다. 양가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부터 우리의 어릴 적 사진, 연인 시절을 거쳐 웨딩 스튜디오 사진이 이어지도록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앨범 어디에도 내 돌 사진이 없었다. 방에서 앨범을 뒤지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아빠에게 소리쳐 물었다. "아빠, 내 돌 사진 못 봤어? 언니 거는 있는데. 왜 내 건 안 보이지?" 아빠는 TV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린다는 둥 딴소리를 하다가 겨우 "잘 찾아봐봐" 한 마디를 하고 입을 닫았다.
그 순간 내가 음흉하게 웃고 있다는 걸 거울을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30년 전에 안 찍은 돌 사진을 이제 와서 어떻게 찾아, 아빠? 사실 알고 있었다. 내 돌 사진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내 돌 사진이 없는 이유는 둘째 딸이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경상도 출신 군인 집안의 장남이자 독자의 두 번째 딸로 태어난 나는 '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하는 한탄과 '딸이 뭐 어때서!' 하는 항변 사이를 오가며 자랐다. 아마 그즈음 IMF가 터지지 않았으면 엄마는 셋째 출산 압박과 아들에 대한 기대에 시달렸겠지. 무슨 조선시대 얘기 같지만 '90년대생이 온다'는 그 90년대생 얘기다. 내가 성차별에 치를 떠는 페미니스트로 자라게 된 건 이런 성장 배경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라고 하면 좀 필요 이상 기구해 보이나?
이렇게 자란 둘째 딸은 임신한 뒤 아이의 성별 얘기가 나오면 괜히 곤두선다. "딸 갖고 싶어, 아들 갖고 싶어?" 같은 애정 담긴 스몰토크에도 "건강만 하면 됐죠" 하며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어놓고야 말았다. 산부인과 검진을 다니면서 내 쪽에서 먼저 성별에 대해 물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성별이 대충 가늠된다는 14주 무렵,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는데(내 관심사는 오직 태아의 안녕이다)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불쑥 말했다. "축하드려요. 딸 같아 보이네요." 내가 환호라도 할 거라 예상했는지 내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의사는 물었다. "혹시 제가 저번에 이미 말해드렸었나요?"
요즘에야 남아선호가 아니라 여아선호사상 시대라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이하긴 마찬가지다. 둘째 딸이라고 돌잔치도 못 한 게 불과 30여 년 전 일인데. '딸바보' 타령은 딸을 그저 '귀엽고 무해한 존재'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마뜩잖다(그저 귀엽거나 무해하지 않은 딸이 여기 있다). "아들은 소용없어.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지." 이런 말들도 반갑지 않았다. 가족 돌봄을 전담하는 자리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임명할 마음은 없다. SNS에 떠도는 '아들 둘맘'의 자조적 농담을 볼 때면 둘째 딸로 받았던 설움을 복기하게 된다.
출산하는 건 아이 엄마가 되는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딸/아들의 엄마가 되는 일이었다. '전통적 젠더 구분에서 자유롭게 키우기 위해 딸에게 분홍색 옷도 안 사줬는데 어느 순간 귀신같이 공주 옷만 찾더라' '아들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기르게 했더니 또래한테 놀림을 받더라' 이런 맘카페의 글을 읽다 보면 페미니스트라고 페미니스트 엄마로 살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라는 아득함이 몰려온다.
애초에 '페미니스트 엄마'라는 명제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자들이 똑똑해졌기 때문이죠." 얼마 전 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친구가 하는 페미니즘 모임에 놀러 갔다가 저출생 얘기가 나오자 누군가 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출산과 육아로 인해 여성들이 받는 차별을 전혀 바로잡지 않는 사회… 거기 대항해 여자들이 출산 파업을 벌이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와, 머쓱했다. 배가 잔뜩 부른 임산부인 채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 임산부 아닌 척이라도 해볼까 싶은데 배에 힘줘봤자 안 들어간다. 30주를 기점으로 날마다 배가 훅훅 나와서 이제는 앞 구르기 하면서 봐도 임산부다.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는데, 뭐라 할 리 없는데, 모두가 파업 중인 현장에서 혼자 땀 흘려 일하는 도비가 된 기분이었다.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뱃속 딸에게 속삭였다. "엄마도 지금 사회에 문제의식이 없는 건 아냐… 알지?"
임신과 출산, 육아는 영 불공평하다. 남자는 재료(그것도 일부)만 제공하고 여자가 말 그대로 뼈와 살을 갈아넣어 열달동안 키운다. 목숨을 걸고 낳는 것도 당연히 여자쪽. 자연의 설계가 구식이라면 인간 사회가 좀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현실은 정반대다. 전체 육아휴직 활용률은 늘어나는 추세인데 남성 육아휴직률은 뒷걸음질 치는 중이다. 남성 육아휴직률은 여성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두 사람이 함께 부모가 되는데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각자 입는 '데미지'는 차원이 다르다. 맘카페에는 여전히 '회사에 임신을 알렸더니 퇴사하라고 하네요' 글이 수시로 올라온다. "꽁으로 부모가 되는구먼!" 임신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괜히 남편을 타박하게 된다. "아무래도 효도 지분은 99(나) : 1(남편) 정도로 해야겠어." 내 심통에 남편은 "그래, 그래." 하면서 퉁퉁 부은 내 다리를 주무른다. 남자들도 육아휴직 하고 '쉬고 싶다'고? 그러면 더더욱 단결해서 함께 싸워야지.
동지를 긁어모아도 모자랄 판인데 페미니스트 임산부는 어딜 가도 깍두기 신세다. 열혈 여성 동지들 보기에는 불공평한 사회 질서에 순응하는 변절자고, "애기를 갖다니 애국자네" 환영하는 쪽은 체제에 순응하는 순둥이로 오해한다. 더욱이 나의 경우에는 특수하다고 할 만큼 운이 좋은 환경이기도 하다. 남편이 나와 바통터치해 육아휴직을 할 것이고 육아휴직으로 인해 직장에서 (악의적인) 불이익은 받지는 않을 것이기에 출산을 결심할 수 있었다. 아가야, 엄마도 이런 세상에 문제의식이… 알지?
얼마 전 3·8 여성의 날을 맞아 곳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여전한 성별 임금격차, 장관 후임조차 지명 안 된 채 고사 상태에 놓인 여성가족부… 집회에 참여할 이유야 적지 않았지만 출산 한 달 앞둔 임산부가 집회와 행진에 낄 자신이 없었다. 대규모 인원이 모였다는 집회 기사들을 읽으며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는 어쩌면 깍두기가 아니라 무임승차자였나. 참가자들이 빽빽하게 모여 구호를 외치는 사진이 SNS에 자꾸 올라왔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래, 싸움의 기본 조건은 쪽수. 나는 쪽수를 늘리는 중이다. 나는 지금 페미니즘 동지를 만날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건 아이의 성별과는 상관 없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