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할머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내 앞에 서 있던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 나를 뒤돌아 본다. 엘리베이터에 이미 탄 사람들과 곧 타려는 사람들이 일제히 나만 쳐다보는데, 호출당한 "애기 엄마"는 자기가 애기 엄마인 줄 모르고 어리둥절이다. 다음 달이면 아기가 나올 텐데 나는 아직도 엄마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게 영 어색하다. 불러만 봤지, 불려본 적이 없어서.
어리바리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내게 아저씨는 엘리베이터 순서를 양보한다. "먼저 타요. 나는 급한 일 없으니까." 이른 출산휴가에 들어와 놓고 집에 있기 답답해서 꽃시장에 가던 나야말로 반백수라 급할 게 없는데, 엉거주춤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인심 좋은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 울려 퍼지는 목소리. "정원 초과입니다. 마지막에 타신 분은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세요." 어쩔 줄 몰라하는 나와 달리 아저씨는 "먼저 가쇼~" 쿨하게 내려버린다. 내 속도 모르고 할머니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찡긋 웃는다. "애기 엄마, 하마터면 못 탈 뻔했다, 그치?" 아니 저는 그냥 봄꽃 사러 나온 반백수라니까요…
임신을 한 뒤로 모르는 어르신들의 보살핌을 자꾸 받는다. 처음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내게 지하철 엘리베이터 위치를 알려주고 노약자석 바통터치를 해준다. 임신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부쩍 내게 말을 거는 노인들이 많다. "아들인 거 같은데?" 그러면 나는 어색하게 "딸이래요" 답하고, "이상하네. 뒤태가 아들 가진 엄만데." "하하. 근데 아들 가진 엄마 뒤태는 좀 달라요?"…… 길 한복판에서 느닷없는 수다가 시작되는 것이다. 펭귄걸음 만삭 임산부와 무릎관절이 아픈 할머니는 어쩜 걷는 속도도 딱 맞는다.
처음에는 이 기묘한 친목은 어르신들 특유의 넉살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아기가 귀한 시대니까 친절을 베푼다고도.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 친해질 수밖에 없다. 동선이 겹치기 때문이다. 임산부와 노인 모두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빈자리를 찾아다닌다. 서울시와 구청, 보건소의 각종 산모 지원 서비스가 헷갈려 대면 상담을 택한 임산부는 인터넷으로 노인 복지 정책을 신청하는 게 어려워 주민센터나 보건소를 찾아온 노인들과 마주친다. 평일 낮에 도서관이나 시장, 동네 카페는 임산부(휴직자)와 노인들의 '나와바리'다.
평일 낮에 도서관이나 영화관에 가보면 '한국에 이렇게 문화를 사랑하는 어르신들이 많았나?' 싶게 노인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책이나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아무 영화나 시간 제일 빠른 거요" 하고 노인 할인 티켓을 끊거나 책은 뒷전이고 자료실에 신문을 펴두고 앉아 책 읽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아마 도서관과 영화관은 '급한 일 없는' 노인들이 한나절을 보낼 수 있는 값싼 공간일 것이다. 반백수가 된 내가 남아도는 시간에 당황하며 무작정 지하철을 타듯이.
소설가 김애란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노년을 예습하는 감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일정 시기 동선이 제한되고, 소득이 줄고, 접촉면이 주는 경험을 전 세계인이 모두 했잖아요? 그러면서 모두 약자성을 경험하게 됐고요. (…) 그런데 자발적 고립과 비자발적 고립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실제 노년의 삶은 제 예상보다 더 혹독하고 어려운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고요." (<AXT> 35호 인터뷰에서)
어쩌면 나는 아주 운이 좋은, 극히 일부의 노년만을 보고 있는 걸 수도 있다. 혼자 운신할 수 있고, 영화 자막이나 책, 신문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관명과 전화번호는 지웠다. 현수막의 선의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므로.
집 근처 도서관 앞에는 이런 현수막이 몇 달째 걸려 있다. "ㄱ~ㅎ까지 한글을 척척 쓸 수 있습니다. 평생소원인 졸업장도 받을 수 있습니다. -OO평생학습관. 문의 OOO-OOOO" 횡단보도를 건너 현수막을 향해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저 현수막이 가장 필요한 노인들은 현수막을 읽지 못하겠구나.' 한글교실을 한글로 써서 홍보하는 게 맞을까. 이것 역시 노년을 예습하면서 처음 떠올려본 질문이다.
예습은 예습일 뿐이고, 실전은 늘 더 맵다. 노년을 예습해 봤자 내가 노인이 되면 VR 안경이나 뉴럴링크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평생학습관을 찾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나는 조금 덜 쌀쌀맞은 젊은이가 된다. 한낮의 카페,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노인, 교통카드 인식이 제대로 안 됐는지 지하철 개찰구에서 경고음이 울려 당황하는 노인에게, 처음 보는 임산부가 말을 건다. "제가 한 번 해볼까요?" 아직 레벨이 낮아서 "아유~ 이거 사람 되게 귀찮게 만들죠. 제가 할게요, 줘보세요." 이런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건 오늘 만난 할머니처럼 콧잔등 웃음을 귀엽게 지을 줄 알게 된 이후에 도전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