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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Mar 26. 2024

너는 벌써 30평에 사는구나

feat. 10CM

"너의 얘길 들었어. 너는 벌써 30평에 사는구나. 나는 매일 라면만 먹어."


대학생때 이런 10CM의 노래 'Fine thank you and you?' 가사를 뭣도 모르고 따라 흥얼거리곤 했다. 정말 뭣도 몰랐다. 네가 30평에 산다는 사실의 위대함을…


올 7월 월세집 만기를 앞두고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있다. 만삭인 채로. 주말부부였던 우리 부부가 살림을 합치면서 20평 월세로 임시 거처를 구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2년째 새로운 집을 구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 참 겁도 없는 부모다. 저지르고 보니 새끼를 가진 어미에게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없다는 게 얼마나 동물적인 불안감을 주는지 매일 느끼고 있다. ('분만 병원을 지금 사는 집 근처로 정해도 되는 걸까?') 당초 우리의 계획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새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그렇듯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아직 월세집에서 지내고 있다.


그래, 엄살이다. 우리 부부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신혼에 우리 집을 장만했고, 시기가 좋아 (코로나19 와중에 결혼한 탓에 상승장에서 '영끌'로 집을 산 지인들은 요즘 집 얘기 하는 걸 극도로 꺼린다.) '갈아 탈' 집을 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집을 구하는 자에게 집값은 언제나 싸지 않아서, 자꾸만 10CM의 노래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30평에, 벌써, 산다고?


임신을 알고 나서 날렵한 투도어 승용차를 포기하고 SUV를 계약했듯, 아기를 갖고 보니 보금자리를 정하는 게 퍽 까다로워졌다. 지금의 월세집 근처에는 맛집, 술집이 즐비하다. 그 덕분에 우리 부부는 퇴근 후 집 앞을 산책하다가 한 잔 기울이는 재미를 톡톡히 누렸다. 임신 전에 이 동네의 장점이었던 게 이제는 치명적 단점이다. 술 취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휘청거리고 골목마다 담배 연기를 피할 수 없어 어미는 자꾸 부른 배를 감싸안게 된다. 이왕이면 집도 넓었으면 좋겠다. SNS에 올라오는 아기자기한 아기방 사진을 볼 때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우리 아기는 내 몸에서 방을 빼면 제 방이 없구나, 하면서. 나도 독립 전까지 혼자 방을 써본 적이 없는데.


출산 이후, 양육 단계를 생각하면 보금자리를 정하는 일은 더더욱 까다로워진다. 얼마 전 집을 보러 갔더니 TV장 위에 임신 테스트기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신혼부부인데 아기가 생겨 나중에 아기를 봐줄 친정 근처로 이사를 갈 생각이라고 했다. 나 역시 육아를 기댈 시가 근처로 집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이렇게 당신과 나의 육아공백이 겨우 포개질 때 우리의 부동산 계약은 이뤄지는 것인가… 했는데 결국 불발됐다. 금액 협의가 안 돼서. 그쪽도 친정 근처에 새로 집을 구하려면 포기할 수 없는 금액 마지노선이 있다고 했다. 완전히 납득해버려서 KO패.


시어머니는 시가 근처 매물을 보러다니는 내게 넌지시 물었다. "너는 운전도 안 하고 다니는데. 역세권이 낫지 않니?" 시가와 지하철역이 먼 게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다. 그런데 내 출퇴근을 걱정하시는 게 맞겠지? 스믈스믈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모른 척하기로 한다. 이 며느리는 시어머니 생각보다 뻔뻔하다. "어머님, 지금 역세권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육세권이에요." 육세권이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시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육아+세권이요. 저는 어머님 댁이랑 가까운 게 1순위예요." 시어머니는 그 뒤로 자꾸 역세권 아파트 매물 정보를 날라다 주신다…


임신을 겪어나가면서 출생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했다. 임신, 출산, 육아는 의식주의 마지노선을 현저하게 높여놓는다. 달마다 몇 백만원 준다고 해결 될 수준이 아니다. 20평이면 딱 좋았던 우리의 공간은 30평대를 바라게 됐고, 집 근처엔 유해시설도 없어야 한다. 심지어는 "옆 단지는 임대주택이랑 같은 초등학교에 배정돼서 이 단지가 더 인기가 좋아요" 같은 부동산중개사의 끔찍한 발언도 예전과는 달리 마냥 힐난하지 못한다.


이러니 '결혼할 결심'부터가 사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1년 차 신혼부부 중 41.8%가 가구 연소득 7000만원 이상이다. 2015년엔 이 비중이 전체의 23.2%에 불과했는데 7년 새 2배 가까이 치솟았다. 다들 결혼을 안 한다는데, 고소득자 비중은 늘어난다. 결혼이 비싸졌다는 의미다. 초혼 부부의 65.2%가 신혼집으로 아파트를 택했다. '빌라왕' 전세사기가 판치고 여전히 등기부등본조차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니 당연한 수순 같기도 하다. 이제 월세집이든 매수든 아파트는 구할 수 있어야 겨우 결혼을 꿈꾼다. 새로운 가족을 늘리는 건 요원할 수밖에.


요새 애들이 고생을 몰라 그렇다고? 배 부른 소리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국민소득 수준이 높아졌는데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쓰다 보니 이렇게 풍진 세상에서 아기 낳을 결심을 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궁색하다. 집 얘기를 하다보면 '그래서'라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갖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직 아기방도, 거기에 달아놓을 앙증맞은 모빌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늘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는, 내가 벌써 30평을 꿈꾸게 만드는 너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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