찡-하다는 건 스쳐가는 사랑의 감각

목요사전04

by 무화과

찡-하다

동사

1. 얼음장이나 굳은 물질 따위가 좀 급자기 갈라지는 소리가 나다.

2. 감동을 받아 가슴 따위가 뻐근해지는 느낌이 들다.

형용사

1. 감동을 받아 가슴 따위가 뻐근한 데가 있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찡하다는 건 스쳐가는 사랑의 감각


나는 찡하면 코부터 고장난다. 깨달음은 대개 후각으로 온다.


가령 중학교 3학년, 짝꿍을 좋아하기 시작한 걸 내 몸의 어느 기관보다 내 코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한여름이었다. 쉬는 시간 10분간 축구를 한답시고 교복이 투명해지도록 땀에 절어 나타난 그 애가 내 옆자리에 풀썩 앉았을 때, 나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 애의 머리카락 끝마다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코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알았다. '아, 나는 이 애를 좋아하고, 이제 이 애에게서는 악취를 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래서 나는 외갓집의 냄새를 모른다. 그 집에는 나의 외할머니가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그녀가 나를 사랑했듯이, 나 역시 나면서부터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유별난 사랑이었다. 인형놀이를 좋아하는 손녀딸을 위해 비단이불을 튿어다가 인형이 덮을 손바닥 만한 솜이불을 만들어냈다. 막내딸에, 막내 손녀딸에, 인형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내리사랑이었다.


나는 정해진 수순처럼 그 집에만 가면 안하무인이 됐다. 옷을 입으면 덥다고, 벗으면 춥다고 떼를 썼다. 그러면 그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의 옷을 벗겼다가 또 입혀주었다. 나를 힐난하려는 듯 눈을 흘기다가 이내 도저히 터져나오는 사랑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환히 웃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엄마는 성당에 오전미사를 드리러 나갔고, 나는 늦잠을 자겠다며 가지 않았다. 혹시 그래서였을까? 라는 멍청한 생각을 요즘도 가끔 한다. 까닭없이 그녀의 심장이 갑작스레 멈췄고, 전화를 받은 나는 고요한 성당으로 뛰어들어가 휴대폰을 꺼놓고 기도 중인 엄마를 찾아헤매야 했다. 하얀 미사포를 똑같이 머리 위에 쓰고 나란히 기도 중인 여자들을 지나고 지나서 엄마를 발견했다. 그녀가 기도 중이던 많은 말들 가운데 가장 듣고 싶지 않았을 답장을 전했다.


장례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러 외갓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코부터 막았다. 아파트 복도에서부터 악취가 코를 찔러댔다. 코가 거의 아팠다. 베란다 한켠에 알량하게 마련해둔 장독대에선 온갖 장이 상해가는 냄새가 났다. 고추장은 이미 썩었고 된장은 썩어가는 중이고 청국장은… 청국장도 음식이라 이런 냄새가 나진 않을 텐데, 싶은 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안 계시니 집안이 엉망인가봐" 내가 말했을 때, 엄마는 "그동안 네가 용케 냄새를 참아낸다 했다"고 답했다. 놀랍게도 나의 사랑하는 그녀는 살림을 깔끔히 해내는 주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모든 음식이 맛스러웠고 그녀가 키워내는 온갖 식물들은 늠름하게 자라났으므로, 나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워낙에 그녀는 감각이 좋은 사람이었다. 사시사철 4남매의 원피스와 멜빵바지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그녀의 실력이 고급 양장점 이상으로 출중해서, 선생들은 4남매를 자신의 반에서 가장 부유한 학생으로 착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만든 옷을 입은 4남매가 3월마다 각각 학교발전기금 대상자 1순위로 불려갔다는 얘기는 집안에서 설화처럼 전해졌다. 길눈이 밝아 혼자 휘적휘적 걸었고, 계단을 오를 때 옆에서 누군가 부축하려 들면 성가시다고 싫어했다.(그때도 나는 예외였다) 요컨대 그녀는 나의 짱짱맨이었다. 그녀의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수년씩 지난 음식들이 나와도 나는 "할머니 냉장고는 타임머신이야!" 하며 깔깔 웃곤 했었다. 능란한 그녀의 애교스러운 실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악취라니.


외할머니의 방은 들어가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그녀가 머물 땐 주저 없이 뛰어들던 곳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그의 옷에 얼굴을 부비며 우는 눈물겨운 엔딩은 거기 없었다. 엄마, 이모들과 나는 쓰레기 봉투를 든 채 전투적으로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그 방에 향기 나는 것이라곤 없었다. 화장대에는 화장품 샘플 용기들만 바닥을 드러낸 채 굴러다녔다. 부엌의 냄새가 고스란히 밴 막옷들이 바닥에 쌓여 있었다. 오래된 책들은 곰팡이 냄새를 풍겼다. 뭔가 냄새를 덮을 만한 물건을 찾아헤맸지만 향초나 향수 같은 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거기엔 아로마 비누가 한 톨 놓여있었다. 내가 5년 전쯤 그녀에게 선물한 딸기향 비누였다. 향은 날아가고, 쨍한 빨간색은 바래버린 뒤였다. 나는 어쩌자고 닳아 없어지는 것을 선물했을까. 그녀는 손녀딸이 선물한, 그 방에서 유일하게 향기 나는 그 물건을 비닐조차 뜯지 않고 고이 서랍 위에 올려둔 채 죽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냄새를 평생 알지 못하게 됐다. 그게 요즘도 가끔씩 내 코끝을 빨갛게 만들곤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