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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31. 2020

와드와 함자는 평화활동가

영화 '사마에게'를 보고

내전의 중심에서 날것의 전쟁을 기록하고 보여주는 영화 '사마에게'


전세계 각종 영화제에서 육십 몇 관왕에 올랐다는 찬사는 차라리 진부했다. 수년째 이어져오는 시리아 내전의 한복판에서 기록한 다큐멘터리라는 설명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이 영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과연, 영화를 보고 나와서 찾아본 영화평과 기사들은 전쟁의 참상을 가감없이 전달했다는 평부터 사마를 위한 모성애 혹은 가족애에 초점을 맞춘 평까지, 뭐라 말하기 힘든 나의 언어를 대변해주지 못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영화평을 대신 써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영화를 본 뒤 내 감정을 표현할 방벙을 모르니. 다만 한 조각 기억이 떠올랐다.


2~3년 전에 광명의 어느 시민강좌에서 평화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병역거부자인 나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말할 때는 혹시나 병역거부를 격하게 싫어하는 분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곤 한다. 특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강좌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혹시나 내 이야기를 불편해 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부터 하곤 한다. 열 대여섯 명이 안 되는 조그만 규모의 그날 강좌에도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한 분 참석하셨다. 돌아가면서 어떤 기대를 품고 이날 강좌에 왔는지 이야기했다. 그 어르신 순서가 되었고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전쟁이 뭔지 알아요?


'아, 익숙한 레파토리가 나오겠구나. 병역거부자인 거 괜히 말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나의 편견은 바로 다음 순간 깨졌다.


전쟁은.... 그냥 암흑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런 생각하는 나도 없어요...  


영화 '사마에게'에게가 보여준 전쟁의 참상은 정말이지 그 참상을 전달할 아무 말도, 아무 언어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특수 분장이나 효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날것의 생경함 - 진짜 피, 진짜 죽음, 연기가 아닌 눈물과 좌절, 무엇보다 바로 옆집에서 터진 폭탄이 감독이자 주인공인 와드의 집이나 병원에 떨어질까봐, 그래서 와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영화가 갑자기 끝이 날것만 같은 공포가 영화 보는 내내 나를 짓눌렀다.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증언하고,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와드와 함자와 어쩌면 사마는 알까? 우리가 결국 기록하고 증언하고 전달하고 기억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 작은 일부의 중요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전체일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화 '사마에게' 스틸컷



평화활동가, 와드와 함자


그래서 나는 <사마에게>를 보고 전쟁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극장에서 뛰쳐나오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꾹 참고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 그래야만 했던 까닭은, 사마보다는 와드와 함자때문이었다. 시리아의 민주화를 염원하며 정부군에 맞서 알레포를 지키고자 했던,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고 병원을 세워 사람들을 치료한, 다시 말해 '알레포'라는 도시와 일상을 지키고자 했던 와드와 함자라는 활동가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화 '사마에게' 티저 포스터. 한국어판 포스터에만 유독 '사랑하는 나의 딸', '넌 우리 삶의 단비였어', '너를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처럼 모성애를 강조하는 문장이 적혀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딸에 대한 모성애로 해석하거나 가족의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이곤 한다. 영화에 대한 해석은 관객 각자의 몫이니 그걸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다큐의 시작, 와드가 카메라로 알레포를 기록하기 시작한 시점이 2011년 시리아의 민주화운동 때부터였다는 것을 주목한다. 아사드 정권의 독재 세습 정치에 맞선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사마에게'에 담겨 있다. 정의감과 행동력이 투철했던 대학생 와드 또한 민주화운동의 일원으로서 일단 영상 기록을 시작했을 것이다. 경제학을 전공한 와드가 처음부터 다큐를 기획하고 영상을 찍지는 않았을 거 같고, 더군다나 민주화운동 이후 기나긴 내전과 그로 인한 수십만명의 죽음, 수백만명이 난민을 예상하고 '사마에게'를 찍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거다.


운동권 대학생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영상 기록은 이후 내전 상황의 알레포를 기록해나간다. 아사드 정권 정부군이 알레포를 포위하고 수도와 가스까지 끊는 상황을, 정부군의 우방인 러시아군의 폭격을, 폭격에 의해 파괴된 도시와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고 주인공인 함자가 일하고 있는 병원을 묵묵히 그려낸다.


와드는 저널리스트로 이 과정을 기록하고, 와드의 카메라에 담긴 함자는 의사로서 알레포에 남아 병원을 세우고 사람들을 치료한다. 따뜻한 휴머니즘에 그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날선 긴장감으로 몰아가는 건, 와드와 함자 두 주인공의 정치적 입장이다. 동지이자 부부인 두 주인공은 자신들의 행동이 봉사활동이 아니라 독재정권에 맞선 싸움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만약 시리아의 민주화운동이 성공을 거뒀다면, 와사드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적인 절차로 대표자가 선출되고 합리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갔다면 와드와 함자는 지금과는 다른 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것, 시리아 내전은 와드와 함자에게 전쟁에 맞선 활동을 요구했고, 그들은 그 요구를 피하지 않고 전쟁에 맞서는 평화활동가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평화운동이 민주화운동이었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 와드(오른쪽)와 그녀의 동지이자 의사인 함자(왼쪽). 이들은 불쌍한 사람을 돕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라와사드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친 활동가다.



활동가 와드와 함자의 선택


와드와 함자는 아사드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해왔다. 시위대 내부에서 기록하거나(저널러스트 와드) 시위대를 치료하면서(의사 함자) 민주화운동에 함께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활용했다. 정부군이 알레포를 포위하고 압박해올 때 그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버텼다.


때로는 존재 자체가 저항이 되기도 한다. 권력자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존재, 폭력이 고스란히 새겨진 몸을 전시하듯 드러내는 존재, 아우슈비츠나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전쟁 범죄에 입은 피해를 증언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권력자를 불편하게 한다. 와드와 함자의 선택 또한 아사드 정권에겐 고래 배 속의 이물질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알레포를 떠나지 않은 그들의 선택은 소극적인 대처이기보다는 적극적인 불봉족이었다. 그들은 남았고, 살아냈고, 맞섰다. 병원이 폭격 당하면 다른 병원을 세우고, 사람들의 끝 없는 부상과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살아갔다. 영상을 계속 찍었고, 언론과 인터뷰를 했으며, '사마에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활동가면서 동시에 겁 많은 인간인 나는 어쩔 수 없이 와드와 함자가 한 선택의 내용보다도 선택 자체에 계속 생각이 머문다. 동료들이 포탄에 죽어나가는 곳, 동료의 죽음과 나의 삶이 아주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그곳에 남기로 한 선택 말이다.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고 결정한 이후 일부 재판에서는 검사가 병역거부자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총을 든 시민군에 대해 부정하느냐?"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곤 한다. 공격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이다. 부정한다고 대답하면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것이 되고, 긍정한다고 하면 병역거부의 양심이 진정하지 않다고 부정당할 것이다. 이런 질문을 가장한 공격에서는 흠집내기 말고는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이렇게 질문을 바꾼다면 어땠을까?


당신은 1980년 5월 26일 밤, 죽음을 무릅쓰고 전남도청에 남았을 겁니까? 아니면 도청에서 빠져나왔을 겁니까?


모르겠다. 내가 와드와 함자처럼 알레포에 남을 수 있었을지, 윤상원 열사처럼 도청에 남을 수 있었을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 "모르겠다."이다. 내 모든 생각과 현재적 판단은 결과론에 기댄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윤상원 열사가 꿈꾼 1980년 5월 27일은 죽음보다는 삶에 가까웠을 수도 있고, 와드와 함자는 알레포에 남기로 하면서 죽음을 먼저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다만 와드와 함자가 활동가로서 선택한 방식의 무게를 짐작해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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